비대면진료가 6년간의 임시 허용과 시범사업을 거쳐 법제화됐지만, 제도의 구체적인 운영 기준을 담을 하위법령을 두고 의료계와 의약계, 플랫폼 업계의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초진 환자의 처방일수를 7일 이내로 제한할지, 탈모·비만 등 비급여 의약품의 비대면 처방을 어디까지 허용할지, 처방약을 어떻게 수령할지 등을 놓고 입장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다.
◇의료·의약계 "초진 처방 7일 제한"…비급여 약 규제도 요구
비대면진료는 2020년 코로나19 유행 당시 처음 도입된 이후, 2025년 12월 의료법 개정으로 정식 제도화됐다. 하지만 초진 환자의 처방 범위와 의료기관의 시행 비율 등 핵심 사항이 하위법령에 위임돼 제도가 구체화되지 않은 상태다.
정부는 오는 9월 초 비대면진료 법제화에 따른 하위법령안을 입법예고할 것으로 알려졌다. 하위법령에는 어떤 환자가 비대면진료를 받을 수 있는지부터 어떤 약을 얼마나 처방받을 수 있는지, 처방약을 어떤 방식으로 수령할 수 있는지 등 실제 비대면진료 이용과 직결되는 세부 기준이 담길 전망이다.
현재 하위법령에는 초진 환자의 처방일수를 '7일 이내'로 제한하는 방안이 유력하게 거론되고 있다. 의약계는 이미 대한약사회와 보건복지부가 운영하는 약정협의체에서 관련 내용을 협의했다는 입장이다.
의약계는 환자 안전과 의약품 오남용을 막기 위해 일정한 제한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비대면 처방 가운데 비급여 의약품 비중이 60.5%에 달한다는 점을 근거로 초진 처방은 최대 7일, 급성기에는 3일로 제한하고 탈모·비만 등 일부 비급여 의약품의 비대면 처방도 제한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장보현 대한약사회 정책이사는 지난 13일 국회 권칠승 의원 주최로 열린 비대면진료 하위법령 제정 정책토론회에서 "재진 인정 기간은 동일 상병 '90일 이내'로 하고, 초진 비대면진료에서는 탈모·여드름 치료제와 고위험 의약품 등 일부 의약품의 처방을 제한하며 처방일수도 '최대 7일'로 제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형갑 대한의사협회 정보통신 이사도 "비대면진료 초진의 경우 향정신성의약품 등을 과도하게 처방하는 의사가 있을 수 있어 제한이 필요하다"며 "초진 처방일수는 개인적으로 3일로 제한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내부 의견이 다양해 총의를 모아 7일로 정하는 방향이 논의되고 있다"고 말했다.
◇의료계 내부서 반대 목소리도…"과도한 규제로 만성질환자 불편 커질 듯"
하지만 의료계 내부에서는 의협의 공식 입장과 달리 초진 처방일수를 일률적으로 7일로 제한하는 것은 과도하다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환자 상태와 질환 특성을 고려하지 않은 획일적인 규제가 오히려 만성질환자의 진료 접근성과 치료 연속성을 떨어뜨릴 수 있다는 것이다.
김헌성 서울성모병원 내분비내과 교수는 "만성질환의 경우 혈압·혈당 데이터나 보호자를 통한 기록만 확인되면 환자가 병원에 직접 오지 않아도 수개월 처방이 가능하다"며 "초진 환자 7일 제한이나 월 비대면진료 비율 30% 제한 같은 수치 규제는 임상 현장에서 아무 의미가 없다"고 말했다.
원격의료산업협의회(원산협)에 따르면 비대면진료는 대부분 초진으로, 신규 이용자의 첫 진료 기준 약 98%를 차지했다. 전체 진료의 45.6%는 고혈압·당뇨병·비염·통풍·탈모 등 지속적인 투약 관리가 필요한 질환이었다.
장기 처방 비중도 높았다. 고혈압 환자의 73%, 탈모 환자의 95.1%가 30일 이상 처방을 받은 반면 감기와 같은 급성질환은 대부분 7일 이내 처방에 그쳤다. 질환 특성에 따라 처방기간이 이미 다르게 적용되고 있는 만큼 일률적인 7일 제한은 만성질환자의 불편만 키울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이처럼 만성질환자에게는 7일 처방 제한이 불필요한 진료를 반복하게 만드는 규제가 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한 수도권 대학병원 가정의학과 교수는 "보통 고지혈증 환자나 고혈압 환자들은 수치가 괜찮으면 3개월치에서 6개월치 처방하는데, 처방을 7일치로 제한하면 이들은 비대면진료를 받지 말라는 소리"라며 "평일 낮 대면진료가 어려운 직장인이나 매일 인슐린 용량을 조절해야 하는 임신성 당뇨 환자 등을 고려하면 7일 처방 제한은 현실과 맞지 않다"고 말했다.
비급여 의약품을 일률적으로 제한하는 데 대해서도 반론이 나온다. 비대면진료에서 탈모·비만 등 비급여 의약품 처방 비중이 높다는 사실만으로 비대면진료 자체를 제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대면진료에서도 동일한 질환에 대한 비급여 처방이 이뤄지고 있는 만큼, 비대면진료와 대면진료의 처방 행태를 함께 비교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김 교수는 "탈모약이나 다이어트약은 의학적 소견에 따라 처방하고 의사가 책임을 지면 될 문제"라며 "일부 비급여 문제를 이유로 만성질환 영역에서 대면 진료 못지않은 치료 효과와 진료 연속성을 보여주고 있는 비대면진료의 가치까지 깎아내려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OECD 주요국은 의사 자율에 맡겨…"한국만 일률 규제"
해외 주요국과 비교해도 국내에서 논의되는 일률적인 처방일수 제한이 지나치게 경직됐다는 지적이 나온다. 일본·미국·호주·독일 등 주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은 비대면진료의 안전성과 의료 질을 확보하기 위한 기준을 두면서도 구체적인 진료와 처방은 국가별 의료체계와 진료 환경에 따라 의료진의 임상적 판단을 폭넓게 인정하는 방식으로 운영하고 있다.
최용재 대한소아청소년병원협회 회장도 "세계적으로 비대면 진료를 허용하는 추세고, 의료 접근성에 맞춰 환자의 선택지를 넓히는 것에 더 큰 의미를 둬야 한다"며 "비대면 진료가 의료의 질을 개선하는 방향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고 강조했다.
플랫폼 업계 역시 초진 처방일수나 비대면진료 비율을 일률적인 숫자로 제한하기보다 의사가 환자의 상태를 보고 비대면진료가 적절한지 판단할 수 있도록 임상적 재량권을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슬 원산협 공동회장은 "의료인은 이미 질환의 특성과 치료 목적에 따라 처방기간을 스스로 차등화하고 있음. 일률적인 7일 제한은 이렇게 작동하고 있는 임상적 판단을 행정 기준으로 대체하는 동시에, 장기 투약이 필요한 환자에게 불필요한 재진 부담을 키울 것"이라고 말했다.
환자단체 역시 불필요한 진료를 반복하게 만드는 규제가 환자의 의료 접근성을 떨어뜨릴 수 있는 만큼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복지부는 초진 처방일수와 비급여 의약품 처방 등 세부 기준에 대해 아직 구체적인 방안을 확정하지 않았다는 입장이다. 박정환 의료인공지능데이터정책과장은 "현재 의견 수렴과 세부 내용 검토가 진행 중이라 구체적인 입법예고 시점을 확정해서 말하기 어렵다"며 "가급적 조속히 입법예고 절차를 진행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한편 정부는 비대면진료 제도화에 맞춰 약배송 허용 대상을 기존 섬·벽지 거주자, 장기요양수급자, 장애인, 감염병·희귀질환자 등에서 모든 비대면진료 환자로 확대하는 방안에 대해 논의를 시작한다. 이를 위해 약사법과 의료법 등 관련 법령 개정도 검토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