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개봉한 영화 '스파이더맨: 브랜드 뉴 데이'에는 뜻밖의 첨단 바이오 기술이 등장합니다. 주인공 피터 파커가 통제 불능으로 강해지는 거미 유전자 변이를 막기 위해 브루스 배너를 찾아가는데, 배너는 그에게 바로 '짧은 간섭 리보핵산(siRNA)'으로 헐크를 통제한다고 말하죠.

'가타카' 등 과거 할리우드 영화들이 '유전자 가위(CRISPR)'를 단골 소재로 썼다면, 이젠 siRNA가 스크린에 등장할 만큼 바이오 업계의 중심축이 이동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영화 '스파이더맨: 브랜드 뉴 데이' 홍보 행사가 열린 지난 1일(현지 시각) 아랍에미리트 두바이 프레임을 스파이더맨 복장의 남성이 오르고 있다./AFP 연합뉴스

siRNA는 실제 신약개발에 도입돼 환자 치료에 쓰이고 있습니다. 노바티스의 고지혈증 치료제 '렉비오'와 앨나일람의 아밀로이드증 치료제 '앰부트라'가 대표적입니다. 둘 다 연 매출 10억달러(약 1조4000억원)가 넘는 블록버스터 의약품입니다.

최근에는 siRNA를 간 이외의 장기로 보내거나, 하나의 약물로 여러 표적을 동시에 조절하려는 기술이 개발되면서 새로운 경쟁이 시작됐습니다.

그렇다면 siRNA는 대체 어떤 원리로 작동하고, 어디까지 진화하고 있는 걸까요.

◇'짧은 이중 가닥'의 힘…질병 단백질 생성을 '간섭'하다

siRNA는 '짧은(short) 간섭(interfering) 리보핵산(RNA)'의 약자입니다.

우선 '짧은'은 약 20~25개의 작은 염기쌍 크기를 말합니다. 구조적으로는 새끼줄처럼 꼬인 '이중 가닥' 형태를 띱니다. 긴 RNA가 체내에 들어오면 면역계가 바이러스로 오인해 공격하지만, '짧은 이중 가닥'으로 다듬으면 감시망을 몰래 통과할 수 있습니다.

'간섭'은 유전 정보가 단백질로 바뀌는 공정에 끼어들어 작업을 방해한다는 의미입니다. 정리하면 우리 몸의 면역 반응을 피할 만큼 짧게 만들어, 질병 단백질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선택적으로 간섭(방해)하는 기술인 것입니다.

작동 원리는 흔히 '원본 문서'와 '작업 지시서'의 관계에 비유됩니다.

우리 몸의 DNA가 유전 정보를 담고 있는 '원본 문서'라면, mRNA(메신저 리보핵산)는 DNA의 정보를 바탕으로 단백질을 만들기 위해 세포 안으로 전달되는 '작업 지시서'입니다. 세포 안의 리보솜은 이 지시서를 읽어 단백질을 만듭니다.

siRNA는 원본인 DNA는 손대지 않습니다. 대신 단백질이 만들어지기 전 단계에서 표적 mRNA를 찾아가 분해합니다. 이를 통해 질병을 유발하거나 악화시키는 단백질의 생성을 차단하는 '유전자 억제(Gene Silencing)'가 일어나는 겁니다.

이 때문에 영화 속 MJ가 피터에게 던진 "지금 DNA를 바꾸고 있다"는 대사는 실제 siRNA의 작동 방식과는 다릅니다. DNA 염기서열을 영구적으로 수정하는 유전자 가위와 달리 siRNA는 유전자 발현을 일시적으로 억제합니다. 약효가 사라지면 해당 유전자의 발현도 다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영화의 '유니버설(만능) 억제제' 역시 현실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실제 siRNA는 특정 유전자의 mRNA 염기서열에 맞춰 설계되기 때문에 하나의 약물이 모든 유전자를 억제할 수는 없습니다.

또 하나의 과제는 '전달'입니다. siRNA가 표적 mRNA를 찾아가려면 먼저 원하는 조직과 세포까지 도달해야 합니다. 현실은 영화처럼 장치 하나로 약물을 투여하면 곧바로 원하는 유전자만 골라 제어할 수 있는 수준에는 아직 이르지 못했습니다.

노바티스의 siRNA 기반 고지혈증 치료제 '렉비오'. 렉비오는 지난해 연 매출 12억달러를 기록하며 블록버스터 의약품에 올라섰다. 올해 2분기 매출은 전년 동기 대비 59% 증가한 4억8000만달러를 기록했다./노바티스

◇감량 넘어 '치료의 질' 높인다…비만약 '파트너' 노리는 siRNA

사실 siRNA는 인체 치료 기술로 개발이 시작된지 30년이 다 되갑니다. 그런데 왜 지금 주목받는 걸까요.

그 배경에는 급성장한 비만 치료제 시장이 있습니다.

노보 노디스크의 '위고비', 일라이 릴리의 '젭바운드' 등 GLP-1 계열 치료제가 체중 감량 시장을 키우면서 업계의 관심은 이제 요요 현상 방지, 근육 손실 최소화, 지방간·내장지방 감소 등 '무엇을 더 할 수 있느냐'로 옮겨갔습니다.

자연히 특정 유전자의 발현을 선택적으로 억제하는 siRNA가 새로운 치료 옵션으로 떠오르게 된 거죠.

이 분야에서 앞서고 있는 기업은 미국 바이오텍 애로우헤드 파마슈티컬스입니다. 애로우헤드는 'ARO-INHBE'와 'ARO-ALK7'이라는 siRNA 기반 후보물질을 개발하고 있습니다.

ARO-INHBE를 티르제파타이드(젭바운드의 주성분)와 함께 투여한 임상 1상에서 병용 투여군의 16주차 최대 체중 감소 폭이 9.4%로, 티르제파타이드 단독 투여군의 4.8%보다 컸다는 중간 결과도 얻었죠. 내장지방은 병용군에서 최대 23.2% 감소해 단독군의 7.4%를 웃돌았고, 지방간도 76.7% 줄어 단독군의 20%보다 큰 감소폭을 보였습니다.

siRNA가 기존 약물과 경쟁하는 데 그치지 않고, 부족한 치료 영역을 보완할 가능성을 보여준 것입니다.

이동기 올릭스 대표가 지난달 14일 서울 여의도 한국거래소에서 '2026 올릭스 R&D(연구개발) 데이'를 열고 발표하고 있다./올릭스

◇'간 한계' 넘어선 배송 기술, 부작용 줄인 '복합 표적'이 온다

기업들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siRNA를 원하는 장기까지 보내는 전달 기술에 도전하고 있습니다.

현재까지 전 세계에서 승인된 siRNA 기반 치료제 8종은 모두 간을 전달 대상으로 삼습니다. 간은 혈액을 통해 약물이 쉽게 도달할 뿐 아니라, 간세포 표면의 특정 수용체를 이용해 siRNA를 세포 안으로 들여보내는 전달 기술도 일찍부터 발전했기 때문입니다.

반면 지방조직이나 근육, 뇌처럼 혈액에서 약물이 원하는 세포까지 도달하기 어려운 장기는 별도의 전달 기술이 필요합니다.

국내에서는 올릭스(226950)가 이 한계에 도전하고 있습니다. 회사가 최근 공개한 'OASIS-DUO'라는 플랫폼은 간으로 전달되는 siRNA와 지방조직으로 전달되는 siRNA를 결합해, 각 장기에서 서로 다른 유전자를 억제합니다. 쉽게 말해 도착지가 다른 두 약물을 하나로 묶어 보내는 '2 in 1 묶음 배송' 기술인 셈입니다.

올릭스는 뇌로도 영역을 확장하고 있습니다. 뇌는 외부 물질을 차단하는 혈뇌장벽(BBB)이 있어, 기존에는 척추에 바늘을 찌르는 척수강 주사로 약물을 보냈습니다. 올릭스는 BBB 통과용 셔틀을 결합한 플랫폼 'OASIS-CNS'를 구축해, 전임상에서 피하주사만으로 선조체·해마 등 심부 뇌 영역에서 표적 유전자를 최대 70~80% 억제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siRNA의 진화 방향은 이뿐만이 아닙니다.

하나의 약물로 여러 유전자를 동시에 억제하려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죠. 여러 유전자가 복잡하게 얽힌 질환에서는 복수의 유전자를 조절하는 것이 치료 효과를 높일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엔 에이프릴바이오(397030)가 뛰어들었습니다. 에이프릴바이오는 최근 RNA 전문 기업 큐리진의 2대 주주로 올라서며 관련 후보물질을 확보했습니다.

기존 siRNA 기반 치료제에는 치명적인 걸림돌이 있었습니다. 이중가닥 중 한 가닥만 일하고, 남은 '승객 가닥(Passenger RNA)'은 체내를 떠돌며 엉뚱한 유전자를 자극해 부작용을 일으켰던 겁니다.

큐리진은 이 승객 가닥에게 또 다른 질병 유전자를 타격하는 임무를 부여했습니다. 부작용의 원인이던 가닥을 활용해, 하나의 분자로 두 질병 유전자를 동시에 잡는 '1타 2피 유도탄'을 만든 것입니다.

이번 스파이더맨 영화에 siRNA가 등장하자 업계와 학계는 신선하면서도 반갑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해외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학생부터 현직 연구진까지 영화 속 과학적 고증을 두고 열띤 논의를 펼치는 중입니다.

스크린까지 사로잡을 정도로 siRNA 기술이 본격적인 '개화기'에 접어들었다는 평가도 나옵니다.

한 업계 관계자는 "실제로 siRNA 기술은 검증을 넘어 확장의 단계에 들어섰다"며 "간을 벗어난 다양한 장기 전달 기술과 복합 표적 제어 기술을 확보한 기업이 시장을 주도하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