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픽=손민균

글로벌 빅파마(대형 제약사)들이 핵심 연구개발(R&D) 파이프라인을 재편하면서 국내 제약·바이오 기업들의 희비도 엇갈리고 있다.

과거에는 수조원대 기술수출 계약 자체가 국내 바이오 기업의 성공 지표로 여겨졌다면, 이제는 글로벌 제약사의 핵심 개발 자산으로 남아 실제 임상과 상업화까지 이어지는지가 기업 경쟁력을 가르는 새로운 기준으로 떠오르고 있다.

4일(현지 시각) 미국 머크(MSD)와 화이자(Pfizer)는 각각 2분기 실적 발표를 통해 향후 성장을 이끌 연구개발(R&D) 전략을 공개했다.

이번 발표를 통해 국내 기업인 알테오젠(196170), 한미약품(128940), 인제니아테라퓨틱스, 디앤디파마텍(347850)이 기술 수출한 후보물질의 개발 방향과 평가도 엇갈렸다.

글로벌 빅파마의 실적 발표는 단순한 경영 성과 공개를 넘어 앞으로 어떤 기술과 후보물질에 개발 역량을 집중할지를 보여주는 자리다.

국내 바이오 기업의 기술수출이 활발해지면서 최근에는 빅파마의 콘퍼런스콜 등 투자자 대상 기업설명회(IR)가 기술수출 이후 국내 기업의 개발 현황과 경쟁력을 가늠하는 '성적표' 역할까지 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알테오젠 플랫폼 상업화 성공…한미·인제니아도 핵심 자산 포함

MSD는 이번 실적 발표 자료에서 알테오젠의 플랫폼 기술이 적용된 '키트루다 큐렉스(KEYTRUDA QLEX)'와 한미약품·인제니아테라퓨틱스로부터 확보한 후보물질을 주요 성장 자산으로 제시했다.

가장 눈에 띄는 사례는 알테오젠이다.

MSD는 알테오젠의 인간 히알루로니다제 플랫폼 기술을 적용한 면역항암제 '키트루다 큐렉스'를 차세대 성장동력으로 제시했다. 키트루다 큐렉스는 기존 정맥주사(IV) 방식의 키트루다를 피하주사(SC) 제형으로 바꾼 제품이다.

올해 2분기 키트루다 큐렉스 매출은 4억6300만달러(약 6600억원)로 시장 전망치를 크게 웃돌았다. MSD는 미국 의료보험 청구를 위한 영구 보험청구코드(J-code·의료기관이 약제 비용을 청구할 때 사용하는 코드) 확보 이후 의료진과 환자의 채택이 확대되고 있으며, 향후 성장 가능성에도 자신감을 나타냈다.

국내 바이오 기업의 플랫폼 기술이 글로벌 블록버스터 의약품에 적용된 데 이어 실제 상업화와 매출 확대까지 이어졌다는 점에서 대표적인 기술수출 성공 사례로 평가된다.

알테오젠 기술(ALT-B4)이 적용된 '키트루다(Keytruda) 피하주사(SC) 제형'인 '키트루다 큐렉스(KEYTRUDA QLEX)'./미국 머크(MSD)

한미약품도 MSD 핵심 파이프라인에 이름을 올렸다. 한미약품이 2020년 MSD에 기술수출한 GLP-1·글루카곤(GCG) 이중작용제 'MK-6024(에피노페그듀타이드)'는 MSD의 후기 개발 단계 주요 후보물질로 포함됐다.

MK-6024는 GLP-1 수용체와 글루카곤 수용체를 동시에 표적하는 이중작용제로, 비만 및 대사질환 치료제로 개발되고 있다.

앞서 올해 초 JP모건 헬스케어 콘퍼런스 발표 자료에서 MK-6024가 제외되면서 시장 일각에서 개발 우선순위 조정 가능성을 제기해 주가가 출렁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 MSD 발표 자료에 다시 포함되면서 개발이 이어지고 있음을 확인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인제니아테라퓨틱스의 안과질환 치료제 후보물질 'MK-8748'도 MSD의 핵심 후기 파이프라인으로 제시됐다.

MK-8748은 인제니아테라퓨틱스가 아이바이오(EyeBio)에 기술이전한 자산으로, MSD가 2024년 아이바이오를 인수하면서 확보했다. 현재 습성 연령관련 황반변성(wAMD)과 당뇨병성 황반부종(DME)을 대상으로 글로벌 임상 3상이 진행 중이다.

◇화이자, 디앤디파마텍 후보물질 조정…"오랄링크 개발은 지속"

MSD와 같은 날 실적 발표를 한 화이자는 일부 경구용 비만치료제 후보물질의 개발 전략 조정을 공개했다. 화이자는 이를 통해 경구용 비만치료제 후보물질 'MET-224o'의 개발 중단을 밝혔다.

MET-224o는 디앤디파마텍이 미국 바이오기업 멧세라(Metsera)에 기술이전한 후보물질로, 디앤디파마텍의 경구 흡수 플랫폼 기술 '오랄링크(ORALINK)'가 적용됐다. 오랄링크는 펩타이드 의약품이 체내에서 안정적으로 흡수될 수 있도록 돕는 경구 전달 플랫폼 기술이다.

디앤디파마텍은 2023년과 2024년 멧세라에 오랄링크 기반 경구용 비만치료제 후보물질 6종을 총 8억350만달러 규모로 기술이전했다. 이후 멧세라가 지난해 화이자에 인수되면서 해당 기술은 글로벌 빅파마의 비만치료제 개발 전략 안에서 평가받게 됐다.

다만 디앤디파마텍은 이번 결정이 오랄링크 기술의 한계 때문이 아니라 화이자의 비만치료제 개발 전략 재편에 따른 것이라고 설명했다.

회사 측은 화이자가 멧세라 인수 이후 차별화된 비만 치료제 개발에 집중하고 있으며, 경구용 펩타이드 기반 GLP-1 후보물질 개발도 이어가고 있다고 밝혔다.

화이자 역시 "경구 펩타이드와 저분자 화합물을 통한 GLP-1 물질 탐색은 지속할 것"이라고 밝혀, 개별 후보물질 조정과 별개로 경구용 비만치료제 분야 연구개발은 이어간다는 방침이다.

◇사노피, 아델·SK바이오 협력 지속…ABL301 우선순위 조정

프랑스 제약사 사노피도 연구개발(R&D) 전략에서 '선택과 집중' 기조가 뚜렷해졌다.

사노피는 국내 바이오벤처 아델이 오스코텍(039200)과 공동 개발한 알츠하이머병 치료제 후보물질 'ADEL-Y01(사노피 개발코드명 SAR449548)'을 도입하고 글로벌 임상 개발을 주도하고 있다.

ADEL-Y01은 알츠하이머병 발병 과정에 관여하는 비정상 타우(Tau) 단백질을 표적하는 항체 치료제 후보물질이다. 현재 임상 1a·1b상이 진행 중이다. 사노피는 지난해 말 아델과 최대 10억4000만달러(약 1조5000억원) 규모의 기술이전 계약을 체결했으며, 이번 발표를 통해 ADEL-Y01을 중추신경계(CNS) 분야 주요 외부 혁신 자산으로 개발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윤승용 아델 대표 겸 서울아산병원 뇌과학교실 교수가 2024년 11월 서울 중구 웨스틴 조선호텔 그랜드볼룸에서 열린 '헬스케어이노베이션포럼(HIF 2024)'의 강연자로 나서 개발 중인 항체 치료 후보물질을 소개하고 있다./조선비즈

SK바이오사이언스(302440)와 공동 개발 중인 차세대 백신 후보물질 'GBP410'도 협력이 이어지고 있다. GBP410은 21가 폐렴구균 단백접합백신 후보물질로, 사노피는 공동 개발을 넘어 소아·성인용 차세대 폐렴구균 백신 분야까지 협력 범위를 확대하고 있다.

반면 에이비엘바이오(298380)가 기술수출한 파킨슨병 치료제 후보물질 'ABL301(사노피 개발코드명 SAR446159)'은 개발 전략 변화의 영향을 받았다.

ABL301은 에이비엘바이오가 2022년 사노피에 기술수출한 이중항체 기반 치료제 후보물질로, 올해 초 개발 우선순위가 하향 조정된 데 이어 이번 2분기 사노피 연구개발(R&D) 파이프라인에서도 제외됐다.

다만 개발 우선순위 조정이 곧 기술이전 계약 해지나 개발 중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에이비엘바이오는 사노피와의 계약이 유지되고 있으며, 후속 개발 전략을 검토 중이라고 설명했다.

업계에서는 이 같은 변화가 국내 바이오 기업의 기술수출이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었다는 신호로 보고 있다. 과거에는 계약 규모 자체가 기업 가치를 좌우했다면 이제는 글로벌 제약사의 핵심 개발 자산으로 남아 임상시험과 상업화로 이어지는지가 기업의 경쟁력을 가르는 핵심 기준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승규 한국바이오협회 부회장은 "과거에는 네이처 매디슨 같은 국제 학술지에 기업 관련 연구 논문이 실리면 상한가를 기록하고, 기술 수출 자체가 신약 개발 성공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했지만, 이제는 기술 이전은 신약 개발 과정의 한 단계일 뿐이며, 임상과 사업화까지 이어지는 지속 가능한 사업 구조를 중요하게 보는 시각이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