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제네릭(복제약)과 특허만료 의약품 약가 인하에 나선 가운데 제약업계에서는 약가 인하 자체보다 예측하기 어려운 제도 변화가 더 큰 부담이라고 입을 모은다.
반복적인 약가 조정이 연구개발(R&D) 투자와 중장기 경영 전략을 위축시키고, 장기적으로는 건강보험 재정 절감 효과도 반감시킬 수 있다는 지적에서다.
◇2012년 약가 인하의 교훈…업계 "가격 인하만으로는 한계"
업계가 이번 개편을 우려하는 배경에는 과거 약가 인하 이후 나타난 시장 변화에 대한 평가가 있다. 2012년 정부의 대규모 약가 인하 당시 단기적으로는 약제비가 줄었지만, 이후 시장 변화와 정책 효과를 두고는 다양한 분석이 나왔다.
한국제약바이오협회 정책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소비자의 의약품 비용 부담은 오히려 13.8% 증가했다. 보험급여 의약품의 수익성이 낮아지면서 일부 기업이 비급여 의약품 비중을 확대하거나 다국적 제약사와 공동판매(코프로모션)를 늘리는 방식으로 대응했기 때문이다.
업계에서는 이번 약가 개편에서도 가격 인하가 시장 구조 변화로 이어질 가능성을 우려한다. 약가 인하 압박이 커지면 제약사 간 가격 경쟁이 심화되고, 이 과정에서 판매대행업체(CSO)를 활용한 우회 영업 등 기존 영업 관행이 확대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한 제약업계 관계자는 "CSO를 통한 영업은 계속 확대되고 있지만 관리 체계는 여전히 부족한 상황"이라며 "약가만 낮춘다고 시장이 투명해지는 것은 아니다"고 말했다.
업계에서는 이러한 가격 경쟁 심화가 단순한 영업 구조 변화에 그치지 않고 기업의 연구개발(R&D) 투자 여력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우려한다. 신약 개발은 후보물질 발굴부터 허가까지 10년 이상 걸리는 장기 투자 영역인 만큼, 약가 제도가 반복적으로 바뀌면 기업이 중장기 투자 계획을 세우기 어렵다는 것이다.
특히 약가 인하 영향은 기업 규모와 사업 구조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정부는 혁신형·준혁신형 제약기업에 대해서는 약가 우대 장치를 마련했지만, 단순 제네릭을 주력으로 하는 중소 제약사는 상대적으로 부담이 커질 수 있다는 것이다.
정윤택 제약산업전략연구원장은 "정부가 혁신형·준혁신형 제약기업에는 약가 인센티브(우대) 장치를 마련했지만, 단순 제네릭을 주력으로 하는 중소 제약사는 상대적으로 직격탄을 맞을 수 있다"며 "대형사가 진출하지 않는 틈새시장이나 필수의약품을 생산하는 기업들의 경쟁력이 약화될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 "약가보다 예측 가능성이 중요…보완 정책 필요"
정부는 이번 개편이 건강보험 재정을 절감하는 동시에 연구개발에 투자하는 기업에는 약가 우대를 제공해 혁신을 유도하는 정책이라고 설명한다. 또 단계적 시행과 최근 공급 부족 우려가 제기됐던 필수의약품(퇴장방지의약품) 지원 등을 통해 공급 불안을 최소화하겠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약가 인하만으로는 지속 가능한 제약산업 구조를 만들기 어렵다고 지적한다. 약가 인하로 줄어드는 기업의 투자 여력을 보완하고, 혁신을 유도할 수 있는 후속 정책이 함께 마련돼야 한다는 것이다.
김동숙 국립공주대 보건행정학과 교수는 "혁신을 지속하려면 결국 투자가 필요한데 현재 제도에서는 기업이 활용할 수 있는 재원이 줄어드는 측면이 있다"며 "약가 인하 이후에도 신약 개발을 이어갈 수 있도록 장려 정책과 보완책이 함께 마련돼야 한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약가를 낮추는 것과 실제 시장에서 저가 의약품 사용이 확대되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는 "생물학적 동등성을 인정받은 제네릭이라면 약값이 낮다고 해서 품질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라며 "의사가 저렴한 약을 처방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등 처방 구조 변화가 함께 이뤄져야 약가 인하 효과가 나타날 수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이와 함께 기업이 중장기 계획을 세울 수 있는 예측 가능한 약가 운영 체계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정윤택 원장은 "기업 입장에서 가장 큰 리스크는 약가 인하 자체보다 정책의 불확실성"이라며 "정부가 재정 건전성을 고려하는 것은 불가피하지만 제도 개편 방향과 기준을 예측할 수 있어야 기업도 중장기 투자 계획을 세울 수 있다"고 말했다.
안정훈 이화여대 융합보건학과 교수는 한국제약바이오협회 정책보고서를 통해 약가가 일정 범위 내에서 변동할 경우 인하를 유예하는 'R-zone' 도입 등을 제안했다. 기업이 약가 변동 위험을 줄이고 생산·연구개발 계획을 안정적으로 수립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취지다.
해외 사례도 대안으로 제시된다. 영국은 의약품가격 규제계획(PPRS)을 통해 제약기업이 국민보건서비스(NHS)에서 얻는 총이익을 관리하는 방식으로 약가를 간접 규제한다. 정부와 영국 제약산업협회(ABPI)는 5년마다 협의를 거쳐 제도를 조정하며 시장의 예측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
정 원장은 "영국처럼 정부와 업계가 정기적으로 협의하는 체계를 통해 정책의 예측 가능성을 높일 필요가 있다"며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에서도 산업계 의견을 보다 균형 있게 반영할 수 있는 논의 구조를 마련해야 한다"고 제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