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오 AI에도 딥시크 모먼트(DeepSeek Moment)가 왔다."
소셜 미디어 플랫폼 틱톡(TikTok)을 만든 중국 바이트댄스가 단백질 구조 예측 인공지능(AI) 모델 '프로테닉스(Protenix)'를 공개해, 신약 개발 시장에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미국 구글 산하 AI 연구소인 구글 딥마인드의 '알파폴드(AlphaFold)'가 연 'AI 기반 신약 개발'에 엔비디아, 인실리코메디슨, 바이트댄스 등 미·중 기술 기업들이 앞다퉈 뛰어들고 있다.
국내에서는 AI를 활용해 단백질을 처음부터 설계하는 '드노보(de novo)' 기술을 가진 갤럭스(Galux), 단백질 간 상호작용(PPI, Protein-Protein Interaction) 빅데이터와 AI를 결합해 신약, 암 동반진단 기기를 개발하는 프로티나(468530) 등이 기술을 사업화하며 시장에 진출했다.
그동안 AI 신약 개발 시장을 구글과 엔비디아 등 미국 빅테크 기업이 미래 먹거리로 삼고 투자해 왔는데, 중국이 뛰어들면서 기술 패권 경쟁이 한층 치열해지고 있다는 평가도 나온다.
◇바이오 AI에도 '딥시크 모먼트'
중국 바이트댄스는 지난해 말 오픈소스 단백질 구조 예측 모델 '프로테닉스(Protenix)'를 공개한 데 이어 올해 4월 '프로테닉스 v2′를 발표했다.
이는 단백질 자체의 구조를 예측하는 수준을 넘어 치료용 항체가 표적 단백질과 어떤 형태로 결합하는지, 즉 항체-항원 복합체 구조를 더욱 정밀하게 예측하도록 성능을 높인 모델이다. 단백질뿐 아니라 DNA·RNA·저분자 화합물 등 다양한 생체분자 간 상호작용을 보다 정밀하게 예측하도록 고도화했다.
업계에서는 AI 신약 개발의 핵심인 생체분자 기반 모델 분야에서 알파폴드 이후 가장 주목받는 오픈소스 모델 중 하나라는 평가도 나왔다.
석차옥 갤럭스 대표(서울대 화학부 교수)는 "프로테닉스의 성능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며 "언어모델 분야에서 딥시크가 등장했을 때처럼, 바이오 AI에서도 '딥시크 모먼트(DeepSeek Moment)'가 왔다고 느꼈다"고 말했다. 그는 "중국이 이렇게 빨리 따라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고 했다.
딥시크 모먼트는 중국의 AI 스타트업 딥시크가 저렴한 비용으로 미국 빅테크 수준의 고성능 AI 모델을 개발해 세계에 큰 충격과 패러다임 전환을 일으킨 순간을 비유하는 말이다. 1957년 소련의 인공위성 발사 충격에 비유돼 'AI 분야의 스푸트니크 모먼트'라는 말도 나왔다.
바이오업계에서는 프로테닉스의 등장을 단순한 AI 모델 공개가 아니라 중국 빅테크의 바이오 진출 선언으로 해석한다.
◇구조 예측 넘어 '신약 설계' 시대
AI 신약 개발 시대를 처음 연 건 구글 딥마인드가 개발한 알파폴드다.
알파폴드는 단백질의 아미노산 서열만으로 3차원 구조를 예측하는 AI다. 생명과학의 난제로 꼽히던 '단백질 접힘(protein folding)' 문제를 사실상 해결했다는 평가를 받으며, 2024년 노벨화학상을 받았다.
알파폴드는 단백질 구조 예측 정확도를 획기적으로 높이며 AI 신약 개발 시대를 열었다. 이후 생성형 AI와 단백질 언어모델이 발전하면서 AI는 단백질 구조를 예측하는 수준을 넘어 새로운 저분자 화합물과 치료용 항체, 단백질을 직접 설계(de novo)하는 단계로 진화하고 있다.
구글 모회사 알파벳은 이를 기반으로 2021년 AI 신약 개발 기업 아이소모픽 랩스를 설립했다. 회사는 2024년 노바티스와 일라이 릴리, 올해 존슨앤드존슨(J&J) 등 글로벌 제약사와 잇따라 신약 연구 계약을 맺었다. 지난 2월엔 자체 AI 신약설계 엔진 'IsoDDE'를 공개하며 단백질 구조 예측을 넘어 후보물질을 직접 설계하는 단계로 기술을 확장했다. 최근 21억달러 규모의 투자도 유치했다.
석차옥 대표는 "AI 신약 개발은 단순히 단백질 구조를 예측하는 단계를 넘어 새로운 치료제를 설계하는 단계로 넘어가고 있다"며 "생체 분자를 이해하는 AI 모델 하나만 제대로 만들면 단백질, 저분자, 세포치료제, 유전자치료제까지 모두 설계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갤럭스·프로티나, AI 신약 사업화 속도
AI 신약 개발 시장을 노리는 기업도 늘고 있다. 노바티스, 화이자, 일라이 릴리 등 빅파마와 연구 협력을 하고 있는 미국 스타트업 차이 디스커버리(Chai Discovery), AI 신약개발 플랫폼 바이오니모(BioNeMo)를 출시한 엔비디아 등이 꼽힌다.
홍콩증시 상장 기업 인실리코 메디슨(Insilico Medicine)도 의약계가 주목하고 있는 회사다. 이 회사는 생성형 AI 플랫폼을 활용해 신약 표적 발굴부터 후보물질 설계까지 수행한다. 회사는 AI를 활용해 수년이 걸리던 후보물질 발굴 기간을 1년 안팎으로 단축했다고 밝혔다.
국내 기업들도 속도를 높이고 있다.
갤럭스는 AI 단백질 설계 플랫폼 '갤럭스디자인(GaluxDesign)'을 기반으로 사업을 확대하고 있다. 회사는 LG화학(051910)과 항암 단백질 신약 공동연구를 시작한 데 이어 셀트리온(068270)과 차세대 다중항체 개발, 올릭스(226950)와 AI 기반 siRNA 전달 플랫폼, 에임드바이오(0009K0)와 BBB(혈액뇌관문) 단백질 전달 플랫폼 공동개발 등 계약을 잇따라 맺으며 협업 범위를 넓혀왔다.
특히 지난해 세계 최초로 상용 항체 수준의 신규 항체를 정밀하게 설계하는 기술을 공개한 데 이어 최근 9개 표적 가운데 8개에서 신규 항체 설계에 성공하며 글로벌 선두권 성능을 확보했다. 현재 글로벌 제약사 3곳을 포함한 다수 기업과 공동 연구를 진행 중이며, 최근에는 국가신약개발사업단(KDDF) 후보물질 발굴 과제에도 선정돼 자체 AI 설계 파이프라인의 사업화를 추진하고 있다.
프로티나는 최근 백민경 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 연구팀과 함께 AI 기반 드노보 항체 설계 기술 사업화에 착수했다. AI가 새로운 항체를 설계하면 프로티나의 초고속 단백질 분석 플랫폼을 이용해 실제 결합 여부를 빠르게 검증하는 방식이다.
◇AI 신약 경쟁, '설계'에서 '검증'으로
초기에는 단백질 구조를 얼마나 정확하게 예측하느냐가 핵심이었다면, 이제는 AI가 새로운 항체를 처음부터 설계하는 '드노보(de novo) 항체 설계'와 설계 성공률을 높이는 기술 경쟁으로 AI 신약 개발 경쟁의 무게 중심이 이동하고 있다.
석차옥 대표는 "1차 경쟁은 '항체를 설계할 수 있느냐'였다면 이제는 '얼마나 높은 성공률로 설계하느냐'의 경쟁으로 옮겨가고 있다"며 "다음 단계는 기존 약물로 공략하기 어려운 GPCR(세포막 수용체)이나 난공략 표적(undruggable target)까지 AI로 설계하는 경쟁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AI 성능이 상향 평준화되면서 설계 능력 자체보다 AI가 설계한 수천·수만 개 후보물질을 얼마나 빠르게 검증해 실제 신약으로 연결하느냐도 승부처로 꼽힌다.
황성택 프로티나 이사는 "결국 중요한 것은 AI가 만든 수많은 후보를 얼마나 빠르고 저렴하게 실험으로 검증하느냐"라며 "앞으로 경쟁력은 AI 자체보다 고속 대량 검증 플랫폼에 달려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AI와 자동화 실험 플랫폼, 나아가 양자컴퓨팅까지 결합한 기술이 차세대 신약개발 경쟁력을 좌우할 것으로 보고 있다.
정재호 연세대 융합과학기술원장은 "AI 다음 단계는 양자컴퓨팅"이라며 "양자컴퓨팅은 AI를 대체하는 기술이 아니라 AI의 계산 능력을 극대화하는 기술"이라고 말했다.
그는 "현재 신약 개발의 한계는 계산 능력의 한계와 정확히 일치한다"며 "10년 후에는 엔비디아와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같은 기술 기업이 설계한 항암제가 등장할 수도 있고, AI는 약을 설계하고 제약사는 생산하는 새로운 산업 구조가 만들어질 수 있다"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