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미국 미시간대 연구진은 위약을 먹었을 때 뇌의 특정 시스템이 활성화하며 실제 통증 완화 반응을 유도한다는 사실을 처음 입증했다./픽사베이

최근 국내 제약·바이오업계에서 임상 후기 단계의 최대 변수로 '위약(플라시보) 효과'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신약 후보물질의 약효는 확인됐지만 위약군의 증상 개선 폭이 예상보다 크게 나타나 통계적 유의성을 확보하지 못하는 사례가 잇따르면서다.

28일 제약·바이오업계에 따르면 최근 코오롱티슈진(950160)이 미국 임상 3상을 진행한 무릎 골관절염 치료제 'TG-C'가 위약군 대비 유의미한 차이를 입증하지 못하면서 업계의 긴장감이 커지고 있다. 올 하반기에도 골관절염과 알츠하이머병 등 대규모 후기 임상 결과 발표가 예정된 국내 기업들이 적지 않은 만큼, 위약 효과가 또다시 성패를 가를 변수로 떠오를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TG-C가 다시 드러낸 '위약의 벽'

코오롱티슈진은 지난 20일 미국 3상 결과, 무릎 골관절염 치료제 'TG-C'가 위약군 대비 통계적 유의성을 확보하지 못했다고 발표했다. TG-C 투여군에서는 통증과 관절 기능이 모두 개선됐지만, 위약군에서도 비슷한 수준의 호전이 나타나 두 군 간 차이가 사실상 사라졌기 때문이다.

회사는 예상보다 강한 위약 효과를 실패의 주요 원인으로 봤다. 노문종 코오롱티슈진 대표는 다음 날 기자간담회에서 "TG-C의 골관절염 개선 효과 자체는 확인됐지만, 위약군에서도 증상 개선이 크게 나타나 차별성을 입증하지 못했다"며 "일반적으로 6개월 이후 감소하는 것으로 알려진 위약 효과가 이번 임상에서는 24개월까지 유지되는 이례적인 양상이 관찰됐다"고 설명했다. 회사는 현재 임상기관별 데이터와 하위군 분석 등을 통해 위약 반응이 커진 원인을 추가 분석 중이다.

코오롱티슈진 경영진이 21일 서울 강서구 코오롱원앤온리타워에서 열린 TG-C 미국 임상 3상 결과 발표 기자간담회에서 질문에 답하고 있다./연합뉴스

위약은 치료 효과가 없는 이른바 '가짜 약'으로 신약 효능을 평가하기 위한 대조군이다. 특히 골관절염처럼 환자가 통증이나 증상을 직접 평가하는 질환에서는 치료를 받는다는 기대감이나 관절강 내 주사 자체에 대한 심리적 영향으로 증상이 호전됐다고 느끼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 때문에 실제 약효가 확인되더라도 위약군과의 차이가 줄어 통계적 유의성을 확보하기 어려워질 수 있다.

이 같은 사례는 국내에서 처음이 아니다. 헬릭스미스(084990)는 2019년 당뇨병성 신경병증 치료제 후보물질 '엔젠시스'의 미국 3상에서 위약 대비 유의성을 확보하지 못하며 개발 일정에 큰 차질을 빚었다. 이후 진행한 3-2상과 3-2b상에서도 1차 평가지표를 충족하지 못했고, 3-3상은 아직 시작도 못했다.

신풍제약(019170)도 지난해 골관절염 치료제 'SP5M002'의 3상에서 대조약 대비 우월성을 입증하지 못했다. 차백신연구소(현 아리바이오랩(261780)) 역시 만성 B형간염 치료백신 후보물질 'CVI-HBV-002'가 2b상에서 위약군과 유의미한 차이를 보이지 못하면서 후속 임상 전략을 다시 설계하고 있다.

위약 효과는 글로벌 빅파마도 피해가지 못했다. 독일 머크의 골관절염 치료제 '스프리퍼민'은 2019년 2상에서 연골 재생 효과는 확인됐지만, 위약군도 식염수 주사만으로 통증이 크게 줄어들면서 두 그룹의 차이를 입증하지 못했다. 일본 다이이치산쿄의 섬유근육통 치료제 '미로가발린' 역시 예상보다 큰 위약 반응으로 2017년 진행한 글로벌 3상 세 건 모두에서 실패했다.

그래픽=정서희

◇"후기 임상은 '설계 싸움'…승패 가르는 '위약 효과'"

이렇다 보니 업계에서는 후기 임상의 성패가 후보물질 자체보다 얼마나 위약 효과를 통제하느냐에 달렸다는 말까지 나온다. 신약의 효능을 입증하려면 약이 잘 듣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위약군의 증상 개선 폭을 얼마나 줄이느냐가 통계적 유의성을 좌우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위약 효과는 단순한 '심리적 착각'만으로 보기 어렵다. 환자가 치료를 받을 것이라는 기대를 갖거나 의료진을 신뢰하는 것만으로도 실제 생리적 변화가 일어난다는 연구 결과가 잇따르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2005년 미국 미시간대 연구다. 연구팀은 위약이 뇌의 천연 진통 시스템을 활성화해 실제 통증 완화 반응을 유도한다는 사실을 처음 입증했다. 즉, 치료 효과가 없는 약이라도 환자의 기대와 믿음이 실제 증상 개선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의미다.

업계는 임상 초기부터 위약 효과를 최소화하는 설계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국내에서 면역항암제를 개발 중인 한 바이오기업 대표는 "예전에는 좋은 약만 만들면 된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좋은 임상을 설계하는 것이 좋은 약만큼 중요해졌다"며 "환자의 기대감, 연구자 설명 방식, 평가자의 숙련도 같은 작은 차이도 위약 효과를 키워 임상 결과를 뒤집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특히 통증이나 삶의 질처럼 환자가 직접 평가하는 지표는 위약 반응이 크게 나타날 가능성이 높다"며 "2상부터 환자 선별 기준을 정교하게 마련하고 평가자 교육을 표준화하지 않으면 3상에서 수백억원을 투입하고도 약효를 입증하지 못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알츠하이머 치료제를 개발 중인 한 바이오기업 연구개발(R&D) 임원도 "후기 임상은 이제 약을 개발하는 싸움이 아니라 임상을 설계하는 싸움이 됐다"며 "플라시보에 민감한 환자가 많이 등록되면 실제 약효가 있어도 위약군과 차이가 줄어들 수 있어 어떤 환자를 등록할지부터 핵심 전략이 된다"고 말했다.

학계에서는 위약 반응이 큰 환자를 임상 시작 전에 제외하는 방안도 논의된다. 대표적인 방법이 위약을 먼저 투여한 뒤 반응이 없는 환자만 본시험에 포함하는 순차평행비교설계(SPCD)다. 다만 위약 반응 역시 실제 의료현장에서 나타나는 환자의 반응인 만큼 이를 인위적으로 배제하면 현실의 환자군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다는 반론도 적지 않다.

위약 효과 자체가 갈수록 커지고 있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캐나다 맥길대 연구팀은 2015년 국제학술지 통증(PAIN)에 발표한 논문에서 실제 약물 반응은 큰 변화가 없지만 위약 반응은 꾸준히 증가하면서 약물과 위약 간 효과 차이가 점차 줄어들고 있다고 분석했다.

아리바이오가 이달 12~15일(현지 시각) 영국 런던에서 열린 알츠하이머협회 국제학술대회(AAIC 2026)에서 루이소체 치매 신약 후보물질 'AR1005'의 국내 임상 2a상 중간 분석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아리바이오

◇ 하반기 후기 임상 줄줄이 대기…'위약 효과' 넘을까

이 때문에 업계의 시선은 올 하반기 발표될 국내 바이오기업들의 후기 임상 결과로 향하고 있다. 골관절염과 알츠하이머병, 안구건조증처럼 환자가 증상을 직접 평가하는 질환이 적지 않은 만큼 후보물질의 약효뿐 아니라 위약 효과를 얼마나 효과적으로 관리했는지가 성패를 가를 것으로 전망된다.

가장 관심을 받는 곳은 금주 중 결과 발표가 예정된 강스템바이오텍(217730)이다. 회사의 무릎 골관절염 치료 후보물질 '오스카'는 코오롱티슈진의 TG-C와 같은 질환을 대상으로 개발되고 있다. 이번 2a상은 위약 대조 방식으로 설계된 만큼 위약군 반응이 어느 정도 나타날지, 통계적 유의성을 확보할 수 있을지가 최대 관심사다.

9월에는 아리바이오가 한국·미국·유럽 등 13개국에서 진행한 경구용 알츠하이머병 치료제 후보물질 'AR1001'의 글로벌 3상 주요 결과를 발표한다.

알츠하이머병을 비롯한 중추신경계(CNS) 질환 역시 위약 반응이 크게 나타나는 대표적인 분야다.

실제로 일본 에자이의 '레켐비'와 미국 일라이 릴리의 '키순라'는 증상이 비교적 명확한 초기 알츠하이머병 환자를 선별해 위약군과의 차이를 입증하는 데 성공했다.

반면 미국 바이오젠의 '아두헬름'은 위약군의 증상 악화 속도가 예상보다 느리게 나타나 약효 입증에 어려움을 겪었다. 업계에서는 아리바이오 역시 글로벌 성공 사례와 유사한 환자 선별 기준을 적용한 만큼 위약 효과를 얼마나 통제했는지가 결과를 좌우할 것으로 보고 있다.

한올바이오파마(009420)대웅제약(069620)과 공동 개발 중인 안구건조증 치료제 'HL036'의 미국 3상 주요 결과를 연내 확보할 계획이다.

회사는 앞선 미국 3상에서 1차 평가지표였던 각막 중심부 염색 점수(CCSS)​와 안구건조 증상 점수(EDS)​에서 위약 대비 통계적 유의성을 확보하지 못했다. 다만 2차 평가지표인 셔머 검사(눈물 분비량 측정 검사)​에서는 위약군보다 유의미한 개선 효과를 확인한 만큼 후속 임상에서는 1차 평가지표 달성 여부가 핵심이 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