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한양행(000100)이 약 4253억원 규모의 자사주를 전량 소각하기로 하면서 시장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회사는 "주주가치 제고를 위한 결정"이라고 설명했지만, 업계에서는 단순한 주주환원을 넘어 정부의 상법 개정 대응과 차기 최고경영자(CEO) 선임을 앞둔 경영 불확실성 관리까지 고려한 전략적 결정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회사는 지난 23일 이사회를 열고 회사가 보유한 자기주식 약 606만주를 모두 소각하기로 결정했다. 소각 대상은 보통주 603만1820주와 우선주 3만2600주로, 약 4253억원 규모다. 이는 보통주 발행주식총수의 7.6%, 우선주의 2.8%에 해당하며 회사가 보유하던 자사주 전량이다. 소각 금액은 이사회 결의 전일 종가인 보통주 7만200원, 우선주 5만8400원을 기준으로 산정됐다.
◇3차 상법 개정에 선제 대응…주주환원 넘어 주가 부양 효과도
유한양행은 이번 결정의 배경으로 '주주가치 제고'를 들었다. 자사주 소각은 유통 주식 수를 줄여 기존 주주의 지분 가치를 높이는 대표적인 주주환원 정책이다. 자사주를 계속 보유하면 향후 재매각 가능성에 따른 오버행(잠재적 매도 물량) 우려가 남지만, 소각하면 해당 물량이 영구히 사라져 보다 강도 높은 주주환원으로 평가받는다.
업계가 주목하는 또 다른 배경은 지난 3월 국회를 통과한 3차 상법 개정안이다. 개정안에는 자사주를 취득하면 원칙적으로 1년 이내 소각하도록 하고, 법 시행 이전 취득한 자사주도 일정 유예기간 내 처분하거나 소각하도록 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이에 업계에서는 유한양행이 향후 소각이 예정된 기존 자사주를 미리 정리하면서 주주환원 효과까지 극대화한 것으로 보고 있다. 어차피 소각해야 할 자사주라면 시장에 명확한 주주환원 메시지를 주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유한양행은 이미 자사주 소각을 꾸준히 확대해 왔다. 2024년 발행주식의 1%인 80만2090주를 2027년까지 소각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고, 지난해 5월 24만627주(약 362억원), 올해 1월에는 32만836주(약 253억원)를 각각 소각했다. 이번에는 보유 자사주 전량을 소각하면서 개정 상법 기조에 맞춘 주주환원 의지를 보다 분명히 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실제 시장도 즉각 반응했다. 유한양행 주가는 자사주 전량 소각 결정을 발표한 다음 날인 24일 종가 기준 전 거래일보다 약 5% 오른 7만4900원을 기록했다.
이번 결정에는 최근 부진했던 주가 흐름을 반전시키고 주주들의 불만을 완화하려는 의도도 담겼다는 분석이 나온다. 유한양행은 국산 항암제 최초로 미국 식품의약국(FDA) 승인을 받은 폐암 치료제 '렉라자'를 상업화했지만, 주가는 2024년 8월 렉라자 승인 당시보다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다. 올해 들어서는 주가가 30% 넘게 하락하며 한미약품(128940)과 종근당(185750), GC녹십자(006280) 등 주요 제약사보다 낙폭이 컸다.
업계에서는 주주들의 실망감이 커진 상황에서 대규모 자사주 소각으로 주가 부양 의지를 분명히 하며 시장에 긍정적인 신호를 보낸 것으로 보고 있다.
◇차기 CEO 선임 지연…새 경영진 부담 덜고, 시장 불확실성 해소
또 다른 관전 포인트는 소각 시점이다.
현재 유한양행은 차기 대표이사 선임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조욱제 대표의 임기는 2027년 3월까지지만, 과거와 달리 후계 구도가 좀처럼 윤곽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유한양행은 이정희 이사회 의장과 조 대표가 각각 대표이사로 선임될 당시에도 전년도 6~7월이면 차기 후보가 사실상 정리됐다. 그러나 이번에는 임기 종료를 약 8개월 앞둔 현재까지도 최종 후보가 좁혀지지 않은 상황이다. 업계에서는 통상 제약업계 휴가철 이후인 9월쯤 차기 대표 윤곽이 드러날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자사주 전량 소각은 차기 대표 선임을 둘러싼 불확실성으로 불안해하는 주주들을 달래고 시장 신뢰를 높이기 위한 성격이 강하다는 해석이 나온다. 주주친화 정책을 먼저 제시해 시장을 안정시키는 동시에, 상법 개정에 따른 부담을 미리 털어내 새 대표 체제가 보다 안정적으로 출범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했다는 것이다.
한 업계 관계자는 "어차피 향후 소각해야 할 자사주였다면 이번에 한 번에 정리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선택"이라며 "주주환원 강화와 상법 개정 선제 대응, 차기 경영진의 부담 완화까지 여러 효과를 동시에 얻은 결정"이라고 말했다. 이어 "제약업계 1위인 유한양행이 먼저 방향을 제시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고 덧붙였다.
◇내부 승진이냐 외부 영입이냐…복잡해진 후계 구도
실제로 자사주 소각 시점과 맞물려 가장 큰 관심사는 차기 대표 선임이다. 업계에서는 대표 선임이 예년보다 늦어지는 배경과 차기 경영체제의 방향이 이번 결정의 또 다른 배경으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있다.
대표 선임이 늦어지는 이유로는 과거보다 복잡해진 후보 구도가 꼽힌다. 기존에는 내부 승진이 유력한 시나리오였지만, 이번에는 외부 영입 인사까지 경쟁에 합류하면서 후계 구도가 한층 복잡해졌다는 평가다.
대표적인 후보는 김열홍 R&D부문 총괄사장이다. 김 사장은 2023년 외부에서 영입된 이후 연구개발을 총괄하며 차기 대표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 만약 김 사장이 대표에 오르면 유한양행 최초의 외부 출신 CEO가 된다.
다만 입사한 지 4년이 채 되지 않아 내부 조직 장악력과 리더십에 대한 우려도 일부 제기된다. 반면 최근 열린 임원 워크숍에서는 김 사장의 역할 비중이 상당했던 것으로 알려지면서 존재감이 더욱 커졌다는 평가도 나온다.
김 사장의 적극적인 자사주 매입도 눈길을 끈다. 그는 입사 이후 꾸준히 회사 주식을 사들였으며 올해에도 가장 활발한 매입을 이어갔다. 지난해 10월 6439주였던 보유 주식은 올해 1월과 3월, 4월 추가 매입을 거쳐 현재 7739주까지 늘었다.
반면 함께 후보군으로 거론되는 내부 출신인 이병만 경영관리본부 부사장과 유재천 약품사업본부 부사장의 보유 주식은 각각 3232주와 1548주다. 올해 추가 매입 규모도 각각 300주, 500주에 그쳤다.
업계에서는 김 사장과 내부 출신 후보들의 경쟁이 이어지는 가운데, 각자대표 또는 공동대표 체제가 선택될 가능성도 거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