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미국 제약·바이오 전문지 파마 매뉴팩처링(Pharma Manufacturing)에 따르면 미국 식품의약국(FDA)이 2020~2024년 신약 승인을 보류하며 기업들에 보완을 요구한 사례의 74%는 화학·제조·품질관리(CMC) 문제 때문인 것으로 나타났다. 단순히 물질의 약효와 안전성뿐 아니라 CMC 역량이 신약 허가의 성패를 좌우하는 핵심 요소로 부상한 것이다.

CMC는 약물의 효능·안전성 평가와 함께 신약 개발 과정에서 중요한 요소로 꼽힌다. 신약을 일정한 품질로 안전하게 생산할 수 있는지, 규제기관이 요구하는 기준에 맞게 제조·관리할 수 있는지를 입증하는 체계다. 전임상시험부터 본임상, 허가, 상업 생산까지 신약 개발 전 과정에 적용되는 필수 요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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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LB·제넥신 발목 잡은 CMC…"약효·안전성만으로는 허가 못 받는다"

30일 오후 서울 강남구 한국과학기술회관에서 열린 '글로벌 경쟁력 확보를 위한 국가 CMC 산업 발전 전략' 세미나에서는 국내 제약·바이오업계가 신약 개발 경쟁력 강화를 위해 국가 차원의 CMC 역량 육성이 필요하다고 한 목소리를 냈다. 이날 행사는 국가신약개발재단(KDDF)과 한국CMC서비스산업연구조합(KCMC)이 공동 주최했다.

참석자들은 국내 바이오산업이 이른바 '죽음의 골짜기'로 불리는 기술·자금 공백 구간을 넘어 글로벌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신약 개발 전 주기를 뒷받침할 CMC 역량 강화가 필수라고 강조했다.

국내 신약 개발 기업들도 CMC 문제에 발목이 잡혔다. HLB(028300)는 간암 신약 '리보세라닙'과 중국 파트너사 항서제약의 면역항암제 '캄렐리주맙' 병용요법으로 미국 FDA로부터 두 차례 허가 보류를 받은 뒤 세 번째 도전에 나섰다. 앞선 두 차례 심사에서는 물질의 약효나 안전성이 아닌 항서제약 제조시설의 CMC 문제가 발목을 잡았다. 업계는 다음 달 23일까지 예정된 세 번째 허가 결과에서 CMC 문제가 해소됐는지 주목하고 있다.

한독(002390) 관계사인 제넥신(095700)도 최근 식품의약품안전처로부터 빈혈 치료제 '에페사'의 품목허가가 반려됐다. 이 역시 안전성이나 효능 때문이 아니라 CMC 결함이 원인으로 지목됐다.

김수동 한국씨엠씨서비스산업연구조합(KCMC) 이사장이 30일 서울 강남구 한국과학기술회관에서 열린 '국가 CMC 산업 발전 전략' 세미나에서 개회사를 하고 있다./염현아 기자

김수동 KCMC 이사장(아주대 교수)은 "신약 개발 실패의 상당 부분이 CMC 문제와 연관돼 있음에도 그동안 연구개발(R&D)과 산업 정책 모두에서 상대적으로 소외돼 있었다"며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기획재정부, 국회 등을 찾아다니며 국내 바이오기업을 지원할 수 있는 CMC 생태계 조성을 위해 노력한 결과, 지난 3월 마침내 KCMC를 출범했다"고 말했다.

이날 행사장을 찾은 구혁채 과기정통부 제1차관도 "우리나라는 후보물질 발굴 단계까지는 비교적 잘해오고 있지만, 이후 임상과 사업화 단계에서는 지원이 부족한 측면이 있다"며 "전임상부터 본임상까지 모든 단계에서 CMC는 중요한 요소인 만큼 정부도 관심을 갖고 지원을 확대하겠다"고 말했다.

◇임상하려면 CMC에만 최소 50억원…"플랫폼·인력 등 국가 생태계 구축 시급"

특히 최근에는 세포·유전자치료제(CGT), 항체·약물접합체(ADC) 등 다양한 모달리티(치료 접근법)가 등장하면서 제조 공정과 품질 기준이 한층 복잡해져 CMC 중요성은 더욱 커지고 있다.

업계에 따르면 신약 개발 초기 단계에서 임상시험 진입을 위한 CMC 준비에만 최소 50억원이 필요한 것으로 알려졌다. 자금 여력이 부족한 바이오벤처와 중소 제약·바이오기업에는 상당한 부담이다.

실제 글로벌 위탁개발생산(CDMO) 기업인 삼성바이오로직스(207940), 스위스 론자, 중국 우시바이오로직스 등은 CMC 역량과 글로벌 규제 대응 능력을 핵심 경쟁력으로 내세우고 있다. 다만 주요 고객층이 중견 제약사와 글로벌 빅파마에 집중돼 바이오벤처와 중소 제약·바이오기업의 접근은 쉽지 않은 상황이다.

CMC는 국가 경쟁력 차원에서도 중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정태 KCMC 이사는 "국내 제약·바이오기업 상당수가 CMC를 중국 등 해외에 위탁하는 구조"라며 "이 때문에 연간 1000억원 이상의 자본과 핵심 공정 데이터가 해외로 유출되고 있다"고 말했다.

최근 해외 규제기관들도 CMC 중요성을 더욱 강화하는 추세다. 한균희 연세대 바이오공정 전문인력양성사업단장은 "미국 FDA와 유럽의약품청(EMA) 등은 최근 바이오시밀러(바이오의약품 복제약) 허가 규제를 일부 완화하면서도, CMC는 필수 요건으로 관리하고 있다"며 "국내 바이오벤처들의 해외 진출 기회가 확대되는 만큼 전문적인 바이오의약품 CMC 교육과 인력 양성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업계는 차세대 신약 개발 경쟁이 본격화되는 상황에서 CMC 역량 확보를 개별 기업의 노력에만 맡기기에는 한계가 있다고 보고 있다. 이에 플랫폼 구축과 전문인력 양성, 규제 대응 지원 등을 포함한 국가 차원의 CMC 생태계 조성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이러한 문제를 풀기 위해 KCMC와 국가신약개발재단은 이날 업무협약(MOU)을 체결하고 국가 CMC 산업 발전을 위해 협력하기로 했다. 양 기관은 바이오벤처의 CMC 역량 강화와 전문인력 양성, 산업 생태계 조성 등을 공동 추진할 계획이다.

임형규 국가신약개발재단 CMC지원팀장은 "CMC는 단순한 서류 작업이 아니라 신약 연구개발(R&D)의 방향을 결정하는 '나침반' 역할을 한다"며 "국내 기업들이 우수한 후보물질을 확보하고도 생산 가능성과 품질 확보 전략을 초기부터 충분히 고려하지 못해 개발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말했다.

이어 "ADC·CGT 등 차세대 모달리티 시대에는 제조 공정 자체가 R&D인 만큼, 후보물질 발굴 단계부터 안정적인 생산과 품질 관리를 지원할 수 있는 선제적인 CMC 플랫폼 구축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