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2년간 한국 기업들과 10조원이 넘는 기술수출·인수합병(M&A)·지분투자를 성사시킨 일라이 릴리의 한국 전략이 한 단계 더 진화하고 있다. 후보물질 확보를 넘어 국내 유망 바이오텍을 직접 육성하는 오픈이노베이션 플랫폼까지 한국에 들여오며 바이오 생태계 투자에 나선 것이다.
그 중심에는 삼성바이오로직스(207940)와 함께 내년 인천 송도 제2바이오캠퍼스에 문을 여는 'C랩 아웃사이드'가 있다. 삼성바이오로직스의 오픈이노베이션센터로 조성되는 이 시설은 릴리의 스타트업 육성 프로그램 '릴리 게이트웨이랩스' 운영 모델을 국내에 이식한 첫 사례다. 미국 밖에서는 중국과 독일에 이어 세 번째 거점이며, 글로벌 빅파마의 오픈이노베이션 프로그램을 국내 기업과 공동 운영하는 첫 사례다.
조선비즈는 25일(현지 시각)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디에이고 토리파인스에 위치한 릴리 게이트웨이랩스를 찾았다. 올해 4분기 입주 기업 모집을 시작하는 송도 C랩 아웃사이드의 운영 방식을 미리 살펴볼 수 있는 현장이었다.
◇멘토링·AI·투자 연계…"릴리와 연구 분야 겹칠 필요 없다"
샌디에이고의 게이트웨이랩스는 연구실만 빌려주는 공간이 아니었다. 입주 기업에는 연구시설과 함께 신약개발 자문, 투자자 네트워크 연계 등을 포함한 지원 프로그램이 제공된다.
현장에서 만난 베레나 스토커 릴리 게이트웨이랩스 유럽 총괄은 "150년에 걸친 릴리의 신약 발굴·개발 경험을 초기 바이오텍과 공유하는 것이 게이트웨이랩스의 핵심"이라고 말했다.
입주 기업은 질환 분야별 릴리 연구진과 연구 방향을 논의하고 임상 개발 전략을 자문받을 수 있다. 투자 유치를 위한 피칭 코칭과 글로벌 투자자 네트워크를 활용할 수 있으며 릴리의 AI 신약개발 플랫폼도 이용할 수 있다. 일부 기업은 릴리 벤처스 투자로 이어진 사례도 있지만, 투자 여부는 입주와 별개다.
스토커 총괄은 "기업별 성장 단계에 맞춰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필요한 전문가를 연결한다"고 설명했다.
연구 분야가 릴리의 기존 파이프라인과 일치할 필요도 없다. 그는 "릴리가 아직 진출하지 않은 분야의 기술도 적극적으로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4조원 투자 이끈 게이트웨이랩스…송도서 바이오텍 30곳 키운다
2019년 출범한 게이트웨이랩스는 현재 미국 사우스샌프란시스코, 보스턴, 샌디에이고, 필라델피아와 중국 베이징·상하이에서 운영되고 있다. 독일 뮌헨에 이어 한국 송도에도 신규 거점이 들어설 예정이다.
샌디에이고 거점은 약 8만2500제곱피트(약 7600㎡) 규모로 18개의 모듈형 연구공간을 갖추고 있으며 최대 15개 바이오텍이 입주할 수 있다. 현재는 10개 기업이 서로 다른 치료 분야와 모달리티(치료접근법)를 연구하고 있다. 같은 건물에는 글로벌 위탁연구기관(CRO)인 찰스리버도 입주해 있어 동물실험 등 연구 서비스를 연계해 이용할 수 있다.
릴리에 따르면 게이트웨이랩스를 거친 기업들은 지금까지 30억달러(약 4조원) 이상의 투자를 유치했고, 릴리 연구진과 200회 이상 공동 연구를 진행했다. 현재는 150개 이상의 치료제 후보물질과 플랫폼 개발 프로젝트가 이뤄지고 있다. 릴리는 이러한 운영 경험을 바탕으로 송도에도 동일한 모델을 도입할 계획이다.
송도 C랩 아웃사이드는 삼성바이오로직스 제2바이오캠퍼스에 지상 5층, 연면적 1만2000㎡ 규모로 조성된다. 릴리는 삼성바이오로직스와 시리즈B 이하 바이오텍 약 30곳을 공동 선발해 기본 2년, 최대 4년간 육성할 계획이다.
스토커 총괄은 "기업 선발부터 육성까지 삼성바이오로직스와 공동으로 운영할 것"이라고 말했다.
◇"韓 연구 경쟁력·초기 바이오 생태계 주목"
스토커 총괄은 릴리가 미국 밖 신규 거점으로 한국을 선택한 이유로 연구 경쟁력과 초기 바이오텍 생태계를 꼽았다. 그는 "한국에서 나오는 과학 논문의 수준은 매우 높다"며 "전임상 단계 바이오텍도 빠르게 늘고 있어 게이트웨이랩스와 잘 맞는 환경"이라고 말했다. 정부의 바이오 산업 육성 정책도 주요 판단 요인으로 언급했다.
이 같은 평가는 릴리의 한국 투자 확대 행보와도 맞닿아 있다. 릴리는 올해 보건복지부와 향후 5년간 5억달러 투자 양해각서(MOU)를 체결하고, GC녹십자 미국 자회사 큐레보를 최대 15억달러에 인수했다. 이달 초에는 한미약품의 GLP-2 후보물질 '소네페글루타이드'를 도입했다. 앞서 지난해에는 에이비엘바이오의 뇌혈관장벽(BBB) 플랫폼 기술을 도입했고, 올릭스·알지노믹스와도 협력하며 국내 바이오 기업과의 접점을 넓혀왔다.
이상명 삼성바이오로직스 위탁개발(CDO)담당 상무는 "C랩 아웃사이드는 릴리 기준에 따라 공동 평가로 입주 기업을 선발하고 프로그램도 함께 운영할 예정"이라며 "릴리 관계자도 송도에 상주해 입주 기업을 지원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그는 "입주가 투자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수 기업은 릴리 벤처스와 삼성의 투자·지원 프로그램으로 연계될 가능성이 있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