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의 5년은 단순한 초기 단계 기술수출에만 만족하는 수준을 넘어서야 한다. 글로벌 빅파마와 완전히 다른 차원의 비즈니스 모델을 논의하고 공동 개발에 참여하는 진정한 '글로벌화'를 보여주어야 할 때다."
이상훈 에이비엘바이오 대표
"어느 한 분야나 특정 정책 하나만 바꾼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한국 바이오가 진정한 글로벌 수준에 도달하려면 바이오텍과 투자자, 전통 제약사와 유통망 등 생태계 구성원 모두가 한 단계 함께 변화해야 한다."
이재준 일동제약 대표

"한국은 이미 아시아의 혁신 중심축이지만, 자본 규모와 산업 구조의 한계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23일(현지 시각) '바이오USA'에서 사상 최초로 열린 한국 산업 집중 조명 세션은 화려한 칭찬보다 뼈아픈 자성(自省)의 목소리가 더 크게 울렸다.

국내외 전문가들은 한국이 글로벌 혁신 거점으로 성장했다는 점에 동의하면서도, 낡은 자본 생태계와 경직된 구조를 혁신하지 못하면 결국 도태될 것이라는 냉정한 진단을 내놓았다.

이상훈 에이비엘바이오 대표가 23일(현지 시각)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바이오USA' 현장에서 ''코리아 라이징(Korea Rising): 아시아의 다음 혁신 허브에 늦지 마라(Don't Be Late to Asia's Next Innovation Hub)' 세션에 패널로 참석, 발언하고 있다./샌디에이고(미국)=박수현 기자

◇'중국식 패스트'와 차별화된 '한국식 퍼스트'가 무기

패널로 참석한 글로벌 제약업계 리더들은 한국 바이오 산업의 강점으로 빠른 사업 추진력과 최초 신약(First-in-Class)을 향한 도전 정신을 꼽았다.

제임스 최 삼성바이오로직스 부사장은 "삼성바이오로직스는 고도화된 인프라와 공급망을 바탕으로 업계 평균보다 40% 빠른 속도로 대규모 설비를 구축하고 있다"며 "착공 후 24개월 이내에 공장을 가동하는 압도적인 속도가 글로벌 고객사들을 유인하는 핵심 경쟁력"이라고 설명했다. 회사는 최근 미국 록빌 소재 시설을 인수하며 글로벌 공급망 다변화도 추진 중이다.

스콧 디와이어 베링거인겔하임 부사장은 "한국 기업들은 혁신적인 신약 개발에 과감히 뛰어드는 대담함과 기업가 정신을 보유하고 있다"며 "베링거인겔하임이 한국에 전담 인력을 배치하고 한미약품, 유한양행 등과 6건 이상의 주요 계약을 체결한 것 역시 이러한 기술력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한다"고 말했다.

황주리 한국바이오협회 본부장은 맥킨지 보고서를 인용해 "한국은 3000개가 넘는 파이프라인을 보유하고 있으며, 인구당 파이프라인 수 기준으로는 세계 1위 수준"이라고 했다.

패널들은 특히 중국 바이오 산업과의 차별화된 포지셔닝을 강조했다. 황 본부장은 "거대 자본과 막강한 환자군을 유치한 중국은 보편적인 타깃을 대상으로 한 '패스트 인 클래스(Fast-in-class)' 전략을 펴지만, 한국은 경쟁이 덜한 틈새시장과 최초 신약 자산을 기민하게 타깃팅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상훈 에이비엘바이오 대표 역시 "중국 기업들은 자국 내 상업화 권리를 지키는 것을 극도로 중요하게 여기지만, 한국은 내수 시장이 글로벌의 1% 수준에 불과하기 때문에 글로벌 빅파마에 100% 권리를 양도하며 협력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점도 강점"이라고 덧붙였다.

제임스 최 삼성바이오로직스 부사장이 23일(현지 시각)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바이오USA' 현장에서 ''코리아 라이징(Korea Rising): 아시아의 다음 혁신 허브에 늦지 마라(Don't Be Late to Asia's Next Innovation Hub)' 세션에 패널로 참석, 발언하고 있다./샌디에이고(미국)=박수현 기자

◇획일화된 IPO 선호와 경직된 구조가 성장 발목

한국 바이오 생태계가 한 단계 더 성장하기 위해서는 경직된 자본 구조와 획일화된 투자 회수(Exit) 전략을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기업공개(IPO)에 편중된 현재의 환경이 산업의 역동성을 저해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국찬우 KB인베스트먼트 최고투자책임자(CIO)는 국내 바이오텍의 높은 밸류에이션(기업가치) 성향과 투자 회수(Exit) 구조의 연관성을 짚었다.

국 CIO는 "한국 바이오 기업들은 일반적으로 기업가치가 높게 평가받기를 원하는 경향이 있다"며 "이는 대부분의 투자자가 인수합병(M&A)보다는 기업공개(IPO)를 통한 회수를 선호하는 시장 환경과 맞물려 있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구조가 창업자와 경영진이 지분을 고수하게 만들고, 결과적으로 글로벌 자본과의 눈높이 차이를 유발한다는 분석이다.

이재준 일동제약 대표는 국내 투자 업계의 획일화된 IPO 선호 현상에 대해 보다 직접적인 쓴소리를 냈다.

이 대표는 "국내 벤처캐피털(VC)의 99%가 오직 IPO 프로세스만을 원하는 것이 냉정한 현실"이라며 "인수 후 통합(PMI) 부담이 없고 전임상 단계의 퍼스트 인 클래스 자산을 가진 아주 깔끔한 바이오텍이 있어도 투자자들은 무조건 IPO만 하겠다고 공언해 유연한 M&A나 협력 딜이 깨지고 있다"고 했다.

현행 정책과 관련해서도 이 대표는 "정부의 지원 방향이 미국 식품의약국(FDA) 심사 기간 단축 등 지엽적인 이슈에 머무는 경향이 있다"며 "선언적 수사(Government speech)를 넘어 투자자, 제약사, 바이오텍을 모두 아우르는 거시적이고 실질적인 로드맵 마련이 시급하다"고 덧붙였다.

◇"생태계 체질 개선 시급…'유연함'과 '기민함' 갖춰야"

제한적인 자본 환경 속에서 국내 기업들은 다양한 전략적 대안을 모색하며 경쟁력 강화에 나서고 있다.

이상훈 에이비엘바이오 대표는 "한국 바이오텍은 혁신적인 초기 기술력을 갖췄으나, 이를 임상으로 밀고 나갈 자금력과 개발 속도 면에서 중국 등 경쟁국에 비해 재정적 한계가 명확하다"고 진단했다. 에이비엘바이오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 미국 캘리포니아에 자회사를 설립하고 현지 전문가 영입을 통해 임상 1상을 직접 수행하는 등 글로벌 현지화 전략을 추진하고 있다.

일동제약 역시 파이프라인 확충을 위해 기존 방식을 넘어 중국 기업의 임상 2상 자산을 도입하는 등 전략적 유연성을 확대하고 있다.

이 대표는 "과거에는 문화적인 거리감 등으로 중국 바이오 기업과의 협력에 다소 소극적이었던 것이 사실"이라며 "그러나 자본과 인재 풀의 한계를 넘기 위해서는 이제 중국의 성장 속도와 사업 모델을 철저히 벤치마킹하고 한 단계 더 긴밀하게 협력해야만 글로벌 무대에서 생존할 수 있다"고 했다.

이날 전문가들은 한국 바이오 산업이 진정한 아시아의 혁신 허브로 자리매김하기 위해서는 생태계 전반의 체질 개선이 이뤄져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시장 논리에 따른 파이프라인 효율화와 우량 기업 중심의 활발한 M&A가 활성화될 수 있도록, 기업과 투자자, 정부 모두가 유연함(Flexible)과 기민함(Agile)을 갖춰야 한다는 조언이다.

세션은 5년 뒤 한국 바이오의 미래를 기약하며 마무리됐다. 좌장을 맡은 조슈아 베를린 바이오센추리 기업 제휴 및 사업개발 부문 총괄은 "오늘 한국 바이오의 명암에 대해 가감 없는 논의가 이뤄졌다"며 "오는 2031년 6월에 이 자리에서 다시 만나 오늘의 전망이 얼마나 현실화되었는지 확인해 보자"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