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그룹과 엔비디아의 인공지능(AI) 동맹이 반도체를 넘어 제약·바이오 영역으로 확대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이동훈 SK바이오팜(326030) 대표가 22일(현지 시각) '바이오USA' 현장에서 엔비디아와의 파트너십 가능성에 대해 "그래픽처리장치(GPU) 활용 등과 관련해 여러 고민이 있는 것이 사실이며, 사고의 경계를 허물고 다양한 혁신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고 직접 밝히면서다.
SK바이오팜은 이날 AI를 신약 연구개발(R&D) 전반을 이끄는 핵심 '운영체계'로 탈바꿈하겠다는 청사진도 제시했다.
◇엔비디아-릴리 모델 닮아가는 SK바이오팜 AI 전략
이 대표가 시사한 '경계 없는 혁신'의 핵심은 AI를 특정 업무를 보조하는 도구가 아닌, 연구개발 생태계 자체를 통제하는 운영체계로 격상시키는 데 있다.
단기적으로는 연구원들이 AI 에이전트와 협업하는 환경을 조성하고, 장기적으로는 복수의 AI 에이전트가 후보물질 설계, 연구기획, 분석, 운영 최적화 등 신약개발 전 과정을 자율적으로 지원하는 체계다.
후보물질 설계와 분석, 연구기획, 개발 전략 수립, 운영 최적화 등 신약개발 전 과정에 AI를 투입해 연구 생산성을 높인다는 목표다.
업계는 이러한 전략이 엔비디아가 최근 제시한 제약·바이오 사업 방향성과 궤를 같이한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엔비디아는 올해 1월 릴리와 향후 5년간 최대 10억달러(약 1조5000억원)를 투자해 AI 공동 혁신 연구소를 설립하며, 실험실 데이터와 AI 가설 검증이 24시간 맞물려 돌아가는 '지속 학습 시스템(Continuous Learning System)' 구축을 목표로 내세웠다. 반복적인 연구 과정을 자동화해 생산성을 극대화하겠다는 SK바이오팜의 구상과 일치한다.
SK바이오팜은 뇌전증 치료제 '세노바메이트(미국 제품명 엑스코프리)' 개발 과정에서 2000개 이상의 화합물 합성 데이터와 FDA 허가 신청 자료 230만 페이지 분량에 달하는 중추신경계(CNS) 데이터도 축적했다. 엔비디아는 릴리와의 협력에서 방대한 연구 데이터와 신약개발 노하우를 핵심 자산으로 평가한 바 있다.
SK그룹과 엔비디아의 끈끈한 파트너십은 이러한 관측에 더욱 힘을 싣는다.
최근 한국에서 이뤄진 최태원 SK그룹 회장과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의 회동에는 최 회장의 장녀인 최윤정 SK바이오팜 사업개발본부장과 황 CEO의 딸인 매디슨 황 엔비디아 수석이사가 동석해 이목을 끌었다.
이동훈 대표 역시 올해 초 황 CEO가 주최한 글로벌 제약사 대상 엔비디아 리셉션에 한국인 CEO 중 사실상 유일하게 초청받아 교류한 바 있다.
◇인실리코와 협력으로 첫 단추…'아시아 기술, 미국 상업화' 본격화
이 대표가 언급한 '사고의 틀을 깨는 혁신'의 첫 파트너는 중국 생성형 AI 신약 개발 기업 인실리코메디슨이다.
SK바이오팜은 인실리코와 중추신경계(CNS) 신경면역 영역의 혁신 신약 후보물질 발굴을 위해 최대 25억7000만달러(약 4조원) 규모의 공동연구 계약을 체결했다. 이는 SK바이오팜이 출범시킨 오픈이노베이션센터(OIC)를 통해 성사된 첫 번째 AI 신약 디스커버리(AIDD) 사례다.
계약 구조 역시 기존과 차별화된다. SK바이오팜이 타깃 선정부터 개발 전 과정을 주도하며, 인실리코의 고도화된 플랫폼 '파마.AI(Pharma.AI)'를 초기 발굴에 투입한다. 이를 통해 후보물질 도출 기간을 기존 대비 50% 가까이 단축한다는 계획이다.
특히 협력 과정에서 도출되는 분자 설계 데이터, AI 예측값 검증 데이터, 화합물 구조-활성 관계(SAR) 데이터 등 핵심 자산은 모두 SK바이오팜에 축적되어 자체 AI 역량을 내재화하는 데 활용된다.
이 대표는 "인실리코는 세계 최초로 AI 기반 신약의 인체 대상 임상(Human PoC)을 달성한 훌륭한 파트너"라며 "SK그룹이 보유한 AI 인프라 역량과 결합해 충분히 '윈윈(Win-win)'할 수 있는 구조"라고 설명했다.
인실리코는 SK바이오팜이 추진 중인 '이스트-웨스트 브릿지(East-West Bridge)' 모델 사례이기도 하다. 신약을 자체 개발해 미국 시장에 직접 상업화(엑스코프리)까지 성공시킨 유일한 국내 기업이라는 경험을 바탕으로, 아시아(East)의 우수한 기술과 파이프라인을 발굴해 미국(West)에서 성공시키는 가교 역할을 하겠다는 비전이다.
이 대표는 "우리가 엑스코프리를 직접 개발하고 상업화하는 데 30년 가까운 시간을 썼지만, 이제는 미국 오퍼레이션이 100% 돌아가고 있는 확고한 인프라를 갖췄다"며 "내부 R&D만 고집하면 또 10년이 걸리겠지만, 오픈 이노베이션과 AI를 양대 축으로 삼아 속도와 성공 확률을 획기적으로 높일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러한 전략의 일환으로 SK바이오팜은 최근 미국 뉴저지에 위치한 현지 법인(SK라이프사이언스)에 글로벌 혁신 공간 '링스(LinX)'를 개소했다.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 한군보건산업진흥원 등과 협력해 한국 및 아시아 바이오 기업들이 미국 시장에 진출하고 정보를 교류하는 전초기지로 활용할 계획이다.
이 대표는 "인실리코의 AI 플랫폼 기술과 SK바이오팜의 미국 임상·상업화 인프라가 시너지를 이루는 이번 계약은 '이스트-웨스트 브릿지'의 강력한 증명"이라며 "외부의 우수한 기술력을 자사 R&D 인프라처럼 유기적으로 활용하는 '확장형 연구소(Extended R&D Lab)' 모델을 향후 신규 타깃 발굴 시마다 반복 적용 가능한 성장 플랫폼으로 진화시키겠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