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가루 음식을 먹으면 소화가 안 되거나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사람이 있다. 글루텐 단백질 때문이다. 이제 유럽에서 글루텐이 없는 밀가루를 골라 먹을 길이 열렸다. 유럽이 글루텐이 생기지 않도록 한 유전자 교정 작물(GEO)은 기존 유전자 변형 작물(GMO)과 달리 규제를 해제하기로 했다.
유럽의회는 지난 17일(현지 시각) 본회의에서 GEO에 대한 규제 해제를 내용으로 하는 신유전체기술(New Genomic Techniques, NGT) 법률안을 표결로 최종 승인했다. NGT는 정밀 육종 또는 유전자 교정의 유럽식 표현이다. 이번에 통과된 법률안은 유전자 교정 기술을 활용한 작물 중 자연적으로 발생 가능한 수준의 변이를 가진 NGT-1 작물을 전통 육종 품종과 유사하게 취급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GMO는 NGT-2로 분류해 계속 규제한다.
◇전통 육종과 같은 방식으로 수용
이번 유럽의회의 결정은 과학계가 계속 주장한 논리를 받아들인 결과이다. GEO는 같은 종 안에서 유전자를 수선해 전통 육종 방식과 원리상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전통 육종은 오랜 시간에 걸쳐 같은 종의 식물을 대를 이어 교배해 원하는 특성을 가진 작물을 만든다. 과학자들은 유전자 교정은 수년씩 걸리는 전통적인 육종을 수개월로 단축했을 뿐이라고 주장해왔다.
GMO는 다른 종의 유전자를 삽입한다는 점에서 GEO와 다르다. 대표적인 예로 우리나라를 포함해 대부분 국가에서 시판되는 제초제 내성 GMO 옥수수는 토양 미생물의 유전자를 삽입한 것이다. GMO는 지난 30년 동안 아무 문제 없이 전 세계에서 소비되고 있지만 전통 육종과 원리가 달라 별도로 규제받고 있다.
미국과 일본, 영국은 유럽보다 앞서 GEO에 대한 규제를 완화했다. 미 농무부는 2016년 유전자 교정으로 변색을 예방한 양송이버섯을 GMO 규제 대상에서 제외했다. 일본 사나텍 시드는 2021년 유전자 교정으로 가바(GABA) 성분을 다섯 배까지 늘린 토마토를 시판했다. 신경 전달 물질인 가바는 혈압을 낮추고 스트레스를 완화하는 데 도움을 준다. 영국은 2023년 3월 GEO 식품 개발과 판매가 가능하도록 법을 바꿨다. 유럽은 작물만 규제를 완화했지만, 영국은 가축까지 포함했다.
유럽에서 유전자 교정 기술이 승인받기까지 10년 이상 걸렸다. 유럽식품안전청(EFSA)은 이미 2012년부터 유전자 교정 기술에 대한 검토 작업에 들어갔으며, 2024년 GEO가 인체에 유해하지 않다는 분석 결과를 발표했다. 유럽집행위원회(EC)는 2023년 7월 5일 GEO 및 NGT 작물에 대한 규제 완화 법안을 공식적으로 제출했다. 이번에 통과된 법안은 유럽연합(EU) 관보에 게재된 날로부터 20일 후에 발효되며, 2년 유예 기간을 거쳐 2028년부터 적용된다.
◇기후변화에 대응, 농업 경쟁력 기대
과학자들과 종자 기업들은 이 법이 질병 저항성, 내열성, 영양가가 개선된 작물의 도입을 가속화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법 개정을 지지해 온 식물 연구 기관 네트워크인 '유전체 편집을 통한 유럽 지속가능 농업(European Sustainable Agriculture through Genome Editing)'은 "유럽의 과학, 혁신, 지속가능한 농업을 위한 획기적인 결정"이라고 했다.
특히 유전자 교정은 기후변화에 따른 농업 피해를 막는 데 기여할 수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가뭄에 강한 밀과 쌀을 개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블룸버그 보도에 따르면 유럽 농업은 온난화가 부른 가뭄과 홍수 같은 기상이변으로 매년 320억달러(약 49조원) 이상의 손실을 입고 있다. 유럽 농업 단체인 '팜 유럽(Farm Europe)'과 '잇 유럽(Eat Europe)'은 "유럽 농민들은 마침내 농업 부문의 회복력, 경쟁력, 지속 가능성을 강화하는 데 시급히 필요한 도구를 갖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이번 법안은 GEO에 대한 특허도 인정해 코르테바(Corteva)와 바이엘(Bayer) 같은 대형 종자 기업에 호재가 됐다. 바이엘의 공공정책 담당 책임자인 마티아스 베르닝거(Matthias Berninger)는 표결 후 인터뷰에서 "지난 30년 동안 미국과 유럽 사이에는 많은 불협화음과 규제 차이가 있었다"며 "이번 표결을 통해 농업 생명공학 분야에서 처음으로 규제가 수렴되는 계기가 마련됐다"고 말했다.
일부에서는 GEO가 GMO처럼 소수의 다국적 종자 회사가 시장을 장악하는 도구가 될 것이라고 우려하지만, 종자 업계는 신생 유전자 교정 기업들에도 활력을 불어넣을 것으로 본다. GMO는 규제가 워낙 까다로워 중소 종자 업체가 상용화 문턱을 넘기 어렵지만, GEO는 개발 비용과 시간이 훨씬 적게 들어 중소기업에 적합하다는 것이다.
◇국내도 법안 발의했지만 표류 중
국내 유전자 교정 기업들의 협의체인 '유전자교정 바이오산업발전 협의회'도 이날 유럽의회의 NGT 법률안 통과에 대해 환영의 뜻을 밝혔다. 협의회 의장사인 툴젠의 유종상 대표는 "이번 EU의 최종 승인은 글로벌 농업 규제 패러다임이 과학 중심으로 전환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라며 "유럽은 혁신을 선택했고 이제는 한국 차례"라고 말했다.
국내에서도 2024년 9월 최수진 국민의힘 의원이 GEO 규제 완화를 내용으로 하는 '유전자변형 생물체의 국가간 이동 등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안(LMO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유럽 NGT 법률안과 비슷하게 'GEO를 GMO와 구분하고, 자연적 돌연변이나 전통적인 교배 육종으로도 얻을 수 있는 수준의 GEO는 GMO 규제에서 완전 면제하는 내용'을 담았지만 2년 가까이 계류 중이다. 비타민D가 강화된 유전자 교정 토마토가 국내에서 개발됐지만 일본과 달리 시판되지 못하는 이유다.
참고 자료
European Parliament(2026), https://www.europarl.europa.eu/news/en/press-room/20260611IPR45215/new-genomic-techniques-for-plants-to-boost-innovation-in-sustainable-agricultu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