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만 치료제 시장의 경쟁 축이 약효에서 투여 편의성으로 옮겨가고 있다. 일라이 릴리와 노보 노디스크는 복용 편의성을 앞세운 경구용 치료제 시장을 확대하는 동시에, 주사제 분야에서는 기존 '주 1회' 투여를 '월 1회' 수준으로 늘리기 위한 장기지속형 제형 개발에 집중하고 있다. 결국 같은 약물을 얼마나 오래, 안정적으로 체내에 전달할 수 있느냐가 차세대 경쟁력으로 떠올랐다.
18일 업계에 따르면 비만 주사제 시장에서의 릴리의 궁극적인 목표 역시 현재 주 1회 투여하는 글루카곤유사펩타이드(GLP-1) 계열 치료제를 월 1회 제형으로 발전시키는 데 있다. 이를 위해 릴리는 장기지속형 약물전달 기술을 보유한 한국의 펩트론(087010), 스웨덴 카무루스(Camurus)와 각각 협력하고 있다.
시장에서는 릴리가 최종적으로 어떤 기술을 선택할지 주목하고 있다. 펩트론과는 기술 평가·공동 연구를 진행 중인 반면, 카무루스와는 이미 기술도입 계약을 체결한 상태다. 업계는 양사의 개발 성과와 상업화 역량이 향후 릴리의 장기지속형 비만 치료제 전략에 중요한 변수로 작용할 것으로 보고 있다.
◇'기술 검증' 펩트론 VS '적용 범위 확대' 카무루스
릴리가 선택한 첫 파트너는 국내 장기지속형 약물전달 플랫폼 '스마트데포(SmartDepot)'를 보유한 펩트론이다. 양사는 2024년 10월 기술평가 계약을 체결하고 공동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스마트데포는 약물을 담는 미립구의 균일성을 높여 방출 속도를 정밀하게 조절하는 기술이다. 기존에는 약물이 체내에서 절반으로 감소하는 데 걸리는 시간인 반감기를 늘려 지속성을 확보했다면, 스마트데포는 전달체 기술을 통해 약물을 오랜 기간 일정하게 방출하는 방식이다.
당초 공동 연구 기간은 지난해 말 종료될 것으로 예상됐지만 이후 정정 공시를 통해 최대 2026년 10월 7일까지 연장됐다.
릴리는 자사 펩타이드 기반 물질에 스마트데포를 적용해 월 1회 제형 상용화 가능성을 시험 중이다. 공동 연구 기간 연장에 따라 GLP-1 계열 치료제뿐 아니라 GLP-1·위억제펩타이드(GIP) 이중작용제와 펩트론의 비만 치료제 후보물질 'PT404' 관련 공동 연구도 진행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업계에서는 릴리가 기술 검증 범위가 확장됐다는 점에서 연내 기술도입 본계약 체결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다.
반면 카무루스는 릴리와 지난해 6월 펩트론보다 먼저 기술도입 계약을 체결했다. 카무루스의 '플루이드크리스탈(FluidCrystal)'은 지질 기반 약물전달 플랫폼으로 약물을 체내에서 서서히 방출해 월 1회 투여를 가능하게 하는 기술이다.
릴리는 당초 GLP-1 계열 치료제에 이 기술을 적용하는 연구를 진행해왔으며 최근에는 아밀린 수용체 작용제까지 적용 범위를 확대하는 권리를 추가로 확보했다. 이에 따라 카무루스 기술은 릴리가 개발 중인 GLP-1·GIP 이중작용제, GLP-1·GIP·글루카곤(GCG) 삼중작용제, 아밀린 수용체 작용제 등 차세대 대사질환 치료제 전반으로 확대될 가능성이 커졌다.
다만 시장에서는 이번 옵션 행사가 펩트론의 기술수출 가능성에 미치는 영향은 제한적일 것으로 보고 있다. 엄민용 신한투자증권 연구위원은 "릴리가 카무루스 기술을 적용한 임상을 아직 시작하지 않은 상황"이라며 "계약상 독점권 유지를 위한 성격의 옵션 행사일 가능성이 크다"고 분석했다.
◇'상업화 경험 多' 카무루스 VS '성장 잠재력' 펩트론
펩트론과 기술 검증을 진행 중인 릴리가 카무루스와 곧바로 기술도입 계약을 체결한 배경에는 상업화 경험이 있다는 점이 꼽힌다. 카무루스의 장기지속형 약물전달 플랫폼은 이미 글로벌 시장에서 검증을 마쳤다는 평가를 받는다.
실제로 플루이드크리스탈이 적용된 카무루스의 약물중독 치료제 '부비달(Buvidal)'은 유럽과 미국 허가를 받아 판매 중이다. 비만 치료제 분야에서도 월 1회 세마글루타이드(위고비 성분) 제형 후보물질(CAM2056)이 올해 하반기 임상 2b상 진입을 앞두고 있다.
다만 말단비대증 치료제 '오클라이즈(Oclaiz)'는 최근 FDA 승인에 재차 실패하며 미국 진출이 지연될 전망이다. 위탁생산시설에 대한 우수 의약품 제조·품질 관리기준(cGMP) 실사 과정에서 지적 사항이 재차 발견되면서다.
반면 펩트론은 성장 잠재력에 주목받고 있다. 스마트데포가 적용된 전립선암·성조숙증 치료제 '루프원'의 국내 허가에 이어 해외 진출을 추진하고 있으며, 월 1회 지속형 비만 치료제 후보물질(PT403)의 글로벌 임상도 준비 중이다.
최근 미국당뇨병학회(ADA)에서 공개된 전임상 결과에 따르면 PT403은 비만 마우스 모델에서 기존 주 1회 세마글루타이드 제제보다 우수한 체중 감소 효과를 보였다. 회사 측은 특히 성인 대상으로 이뤄진 안전성 평가에서 구토와 메스꺼움 등 GLP-1 계열 치료제의 대표적인 위장관계 부작용을 크게 줄였다고 설명했다. PT403은 현재 20여 개국에 특허를 출원했으며, 2030년 품목허가가 목표다.
펩트론은 비만 치료제 외에도 말단비대증, 연골무형성증 등 희소질환 치료제 개발에 스마트데포를 활용하는 한편, 글로벌 제약사들의 기존 치료제를 월 1회 제형으로 전환하는 사업도 추진하고 있다. 특히 충북 오송 제2공장 건설을 통해 향후 대규모 생산 역량 확보에도 나서고 있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릴리의 월 1회 비만 치료제 전략의 핵심은 새로운 약물을 찾는 것이 아니라 기존 약물을 얼마나 오래, 안정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기술을 확보하느냐에 있다"며 "현재 펩트론과의 공동 연구가 상당 부분 진행됐고, 카무루스와는 적용 범위를 확대하고 있는 만큼 릴리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하기보다 두 플랫폼을 전략적으로 병행 활용할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