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미국 시카고에서 열린 미국임상종양학회(ASCO)의 최대 화제는 임상 3상에서 전이성 췌장암 환자의 생존기간을 두 배 가까이 늘린 미국 레볼루션메디신(Revolution Medicines)의 신약 후보물질이었다. 40년 넘게 난제로 꼽혀 '암 중의 암'으로 불리는 췌장암 치료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줬다는 평가가 나온다.
17일 제약바이오업계에 따르면 레볼루션메디신은 지난달 29일부터 이달 2일(현지 시각)까지 열린 ASCO에서 전이성 췌장암 환자를 대상으로 진행한 신약 후보물질 '다락손라십'의 임상 3상 결과를 공개했다.
다락손라십을 하루 한 번 경구 투여한 결과, 환자의 전체 생존기간 중앙값(mOS)은 6.7개월에서 13.2개월로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발표 직후 행사장에서는 기립박수가 쏟아졌다.
이처럼 ASCO에서 기립박수가 터져 나온 것은 2022년 엔허투 임상 3상 발표 이후 처음으로 꼽힌다. 당시 일본 다이이찌산쿄는 영국 아스트라제네카와 공동 개발한 항체·약물접합체(ADC) 신약 '엔허투' 3상 결과를 발표했고, 글로벌 ADC 시장의 폭발적인 성장을 이끄는 계기가 됐다.
췌장암은 치료 선택지가 매우 제한적인 대표적인 난치암이다. 췌장이 복부 깊숙한 곳에 위치해 조기 발견이 어렵고, 환자 상당수가 수술이 어려운 진행성 또는 전이성 단계에서 진단된다. 완치를 기대할 수 있는 수술을 받는 환자는 전체의 15~20% 수준에 불과하다. 나머지 환자들은 항암화학요법과 방사선 치료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현재 사용되는 치료제는 1990년대 개발된 항암제 '젬시타빈', '아브락산', '폴피리녹스' 등 정도다. 그러나 치료 효과가 제한적이고 부작용 부담도 커 새로운 작용기전의 치료제 개발 필요성이 꾸준히 제기돼 왔다.
특히 전이성 췌장암 환자의 생존기간은 통상 6~7개월 수준에 머무르는 만큼, 이런 상황에서 다락손라십이 생존기간을 두 배 가까이 늘린 결과를 내놓으면서 업계의 이목이 쏠리고 있다.
더욱 주목받는 이유는 40년 넘게 신약 개발의 난제로 꼽혀온 'RAS'를 직접 겨냥했다는 점이다. RAS는 세포의 성장과 증식을 조절하는 단백질로, 돌연변이가 발생하면 암세포가 계속 증식하도록 만드는 역할을 한다. 췌장암과 대장암, 비소세포폐암 등 주요 고형암에서 흔하게 발견되지만, 복잡한 분자 구조 때문에 약물이 결합하기 어려워 수십 년간 치료제 개발이 실패해왔다.
다락손라십은 활성화된 RAS 단백질에 결합해 암세포의 증식 신호를 차단하는 방식으로 작용한다. 특정 변이만 겨냥하는 기존 접근법과 달리 다양한 RAS 돌연변이에 적용할 수 있다는 점이 강점으로 꼽힌다. 회사는 이번 성과를 바탕으로 췌장암뿐 아니라 대장암, 비소세포폐암 등으로 개발 범위를 확대할 계획이다.
김민정 DS인베스트먼트 연구원은 "이번 ASCO 2026의 주인공은 단연 레볼루션메디신의 췌장암 3상 성공"이라며 "40년간 난제로 꼽혔던 RAS를 향해 인류가 첫 발자국을 내디딘 순간"이라고 평가했다.
국내 기업들도 췌장암 치료제 개발 경쟁에 뛰어들고 있다. 대표 주자는 제일약품(271980) 자회사 온코닉테라퓨틱스(476060)의 차세대 이중표적 항암제 '네수파립'이다. 현재 전이성·진행성 췌장암 환자를 대상으로 기존 표준치료인 '젬아브락산'에 네수파립을 병용 투여하는 방식으로 2상을 진행 중이다.
회사는 이번 ASCO에서 앞서 진행한 임상 1b상 연구 결과를 공개했다. 발표에 따르면 암세포가 완전히 사라진 상태인 완전관해(CR)가 40개월 이상 유지된 사례가 확인됐으며, mOS는 14.2개월로 나타났다.
네수파립은 암세포의 DNA 손상 복구를 담당하는 '파프(PARP)'와 암 성장에 관여하는 '탄키라제(Tankyrase)'를 동시에 억제하는 이중표적 항암제다. 기존 PARP 저해제의 한계로 지적돼 온 내성 문제를 극복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개발 단계에서도 성과를 내고 있다. 네수파립은 2021년 미국 식품의약국(FDA)으로부터 췌장암 치료제 희소의약품지정(ODD)을 받았다. 희소의약품으로 허가될 경우 최대 7년간 시장 독점권과 수수료 감면, 개발 지원 등의 혜택을 받을 수 있다. 올해 3월에는 위암·위식도접합부암 치료제 분야에서도 추가로 희소의약품지정을 획득하며 적응증 확대 가능성을 넓혔다.
프레스티지바이오파마(950210)는 췌장암 항체신약 'PBP1510'을 개발하고 있다. 이 후보물질은 췌장암 환자의 약 80%에서 과발현되는 췌관선암 과발현 인자(PAUF)를 표적으로 한다. 현재 미국과 유럽 등에서 임상 1·2a상이 진행 중이다.
반면 현대바이오사이언스는 췌장암 치료제 '폴리탁셀' 개발 확대를 추진했지만, 최근 임상 1상 시험계획을 자진 취하했다.
글로벌 제약사들의 개발 경쟁도 치열하다. 스위스 로슈, 노바티스, 미국 화이자, 머크(MSD)등 주요 빅파마들이 췌장암 치료제 개발에 나서고 있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 췌장암 치료제 후보물질 164개가 전임상 단계에 있으며, 233개는 초기 임상 단계, 29개는 임상 3상 단계에서 개발되고 있다.
이 가운데 영국 아스트라제네카의 '린파자'는 MSD '키트루다'와의 병용요법으로 종양억제단백질을 만드는 BRCA(브라카)1·2 변이 전이성 췌장암 환자를 대상으로 임상 2상을 진행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