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쪽에서는 전신마취제와 마약류 의약품이 통제 없이 불법 유통되고, 다른 한쪽에서는 아이들의 해열제가 없어 품절 대란이 번진다. 겉보기엔 별개의 사건처럼 보이지만, 제약 업계와 전문가들은 국내 의약품 공급망의 '정보 불투명성'이 낳은 결과라고 지적한다. 생산을 늘려도 현장에서는 약이 사라지는 아이러니, 그 중심에는 3500여 개 업체가 난립해 재고를 묶어두는 기형적인 유통 구조가 있다. 전·현직 업계 관계자들을 만나 곪아 터진 국내 의약품 유통 체계의 구조적 허점과 해법을 심층 취재했다. [편집자 주]

서울 종로 5가의 한 약국 앞./연합뉴스

"쿠팡에서 주문한 물건은 물류센터를 떠난 순간부터 도착까지 이동 경로를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국민 건강과 직결된 의약품은 출하 이후 중간 단계 어디에서, 어떤 문제가 생겼는지도 제대로 추적되지 않는다."

한 제약사 직원의 토로다. 같은 '물류'지만, 이커머스 배송은 전 과정이 투명하게 추적되는 반면 의약품 유통은 여전히 블랙박스로 머물러 있다. 이 탓에 '약이 깨져서 왔다', '주문한 약이 분실됐다'는 약국의 민원에도 제약사 입장에선 중간 경로를 확인할 방법이 없다. 여름·겨울철 철저한 온·습도 관리가 중요한 알약이 약국 문 앞에 수 시간 방치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의약품을 충분히 생산했지만 현장에서는 사라지고, 동시에 불법 거래와 품절 대란도 반복되고 있다. 업계와 전문가들은 의약품 유통 전 과정이 데이터로 연결되지 않는 구조적 공백을 문제로 지목한다.

일부 제약사들이 디지털 플랫폼 도입과 물류 혁신을 추진하고 있지만, 도매업계는 생존권 침해라며 반발하고 있다. 해법을 둘러싼 논쟁의 본질은 결국 '누가 유통 데이터를 통제하느냐'로 모아진다.

한미사이언스 '온라인팜(HMP몰)'의 첨단 인공지능(AI) 수요예측 설루션 도입 상황을 묘사한 이미지./한미사이언스

◇한미 '플랫폼 실험', 대웅의 '거점 도매'…제약사의 혁신 시도

국내에서 의약품 도매업계와 제약사 간 갈등의 첫 불씨가 생긴 건 온라인 기반 의약품 전문 주문 플랫폼이 등장하면서다.

한미사이언스(008930)는 2010년대 중반 자회사 온라인팜을 설립하고 의약품 주문 플랫폼인 'HMP몰'을 구축했다. 약국 주문과 재고 확인, 정산을 하나로 통합하고 RFID 기술로 약국 단위의 재고 흐름을 추적하는 시도였다.

당시 도매업계는 "제약사가 유통 생태계를 침범한다"며 강력히 반발했고, 회사는 일부 사업 계획을 수정해 갈등을 봉합했다. 시간이 흘러 현재 HMP몰은 전국 약국 대부분이 사용하는 대표 플랫폼으로 자리 잡았다.

최근에는 주문 플랫폼을 넘어 물류와 배송 영역까지 통합하려는 시도로 발전했다.

대웅제약(069620)이 운영하는 B2B 플랫폼 '더샵'이 대표적이다. 대웅제약은 여기서 나아가 전국을 권역별로 나누고 기준을 충족한 도매업체를 거점으로 삼는 '블록형 거점 도매' 모델을 추진 중이다.

다단계 유통을 단순화하고, AI 기반 수요 예측과 바코드 배송 추적 시스템(TMS)을 통해 약의 위치와 지역별 재고를 실시간 파악하는 것이 핵심이다. 콜드체인 관리를 강화해 배송 완료 시 사진과 위치 데이터를 약사에게 전송하고, 반품도 10일 이내에 처리하겠다는 구상이다.

그래픽=정서희

◇도매업계 "시장 통제이자 생존권 위협" 반발

도매업계는 제약사들의 이런 시도가 시장 질서를 훼손한다며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 최근 한국의약품유통협회는 대웅제약의 정책 철회를 요구하며 집회를 이어가는 중이다.

이들은 거점 도매 방식이 일부 업체에 물량을 몰아주는 '유통 통제'라고 주장한다. 여러 단계인 도매 구조가 오히려 공급 안정성을 유지하는 완충 장치였다는 것도 현 도매 구조가 합당하다는 주요 논리다.

한 도매업체 관계자는 "특정 도매업체에 재고가 없을 때 다른 도매를 통해 즉시 물량을 확보할 수 있다"며 "도도매는 비효율이 아니라 위험 분산 장치"라고 말했다. 그는 "이걸 끊으면 오히려 품절이 더 늘어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중소 도매상들은 강화된 물류 기준과 IT 시스템 조건을 맞추기 어려워 시장에서 퇴출당할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또 다른 업계 관계자는 "겉으로는 투명화지만 실제로는 중소 도매업체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구조 재편"이라고 비판했다.

"대웅제약이 강행하는 거점 도매 정책은 유통업계가 유통 주권을 확보하고 건강한 생태계로 나아갈 것인지, 아니면 제약사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단순 배달업체로 전락할 것인지를 가르는 중대 기로가 될 것이다. 거점 도매 정책은 중소 유통사들에 통행세를 강요하는 유통 갑질이자 독점 행위다."
박호영 한국의약품유통협회장
"국내 의약품 유통은 누구도 건드리지 않으니 이미 강력한 카르텔을 형성하고 있다. 현재 제약사는 약국에 약을 직접 납품할 수 있지만 현실적인 물류 장벽과 행정 부담 등으로 인해 사실상 도매상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다. 유통 과정에서 제약사가 결코 '갑'이 될 수 없는 구조다."
국내 제약사 관계자

◇"유통 혁신 해법은 데이터…민간·공공 함께 가야"

여러 '도도매(도매업체 간 재판매)'로 얽혀 있는 유통 구조가 의약품 품절 완충 역할을 한다는 업계의 주장에 대해 전문가들의 시각은 달랐다.

김정식 연세대 경제학과 명예교수는 "과거 오프라인 중심 시장에서는 다단계 유통 구조가 일정 부분 위험 분산 기능을 했을 수 있지만, 디지털 전환 시대에는 오히려 비용과 비효율을 키우는 요인이 될 수 있다"고 짚었다.

이상원 성균관대 약학대학 교수는 반복되는 의약품 품절 대란을 소비자 단계의 작은 수요 변화가 상위 공급망으로 갈수록 증폭되는 '채찍효과(Bullwhip Effect)'로 설명했다.

이는 작은 불안이 유통 과정에서 점점 부풀려져 실제 품절을 악화시키는 현상이다. 즉, 도매상이 많고 유통 단계가 복잡하면 일부 약국의 작은 주문 증가에도 민감하게 반응해 각 단계에서 안전 재고를 더 쌓으려고 하면서 품절 대란 같은 불안을 키운다는 설명이다.

2023년 6월 대한아동병원협회가 기자회견을 열고 소아 청소년 필수약 품절 실태를 지적하며 정상화 대책 마련을 촉구하고 있다./뉴스1

전문가들은 국내 유통 체계를 투명화·선진화해야 한다는 데 공감했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심평원)의 용역 과제인 '의약품 유통 체계 개선 방안 연구'를 이끈 김동숙 국립공주대 보건행정학과 교수는 "누구도 전체 재고와 유통 흐름을 보지 못하는 상태에서는 경쟁도, 효율도 제대로 작동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기업들의 유통 혁신 시도 자체는 필요하다는 평가도 잇따랐다. 다만 시장 전체의 편익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도 함께 살펴봐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시각이다.

대웅제약의 거점 도매 모델에 대해 김동숙 교수는 "온도 관리가 중요한 품목의 유통 단계를 줄이고, 재고와 배송 현황을 실시간으로 파악할 수 있는 체계가 필요하다는 정책 방향성과 맞닿아 있다"고 평가했다. 그는 "다만, 경쟁 제한 가능성이나 기존 업체 배제 문제는 별도로 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유통 효율화가 특정 기업의 시장 지배력 강화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는 얘기다.

이상원 교수도 "유통망을 디지털화하고 재고 가시성을 높이는 방향 자체는 맞다"면서도 "유통 효율화로 발생하는 편익이 소비자나 건강보험 재정, 약국 전반이 아닌 특정 제약사와 일부 대형 유통업체에만 돌아간다면 또 다른 갈등이 생길 수 있다"고 지적했다.

지난해 6월 17일 중국 베이징 경제기술개발구에 있는 모의 약국에서 갤봇의 휴머노이드 로봇이 약국 도우미 역할을 시연하고 있다./신화통신 연합뉴스

제약사와 도매업계 사이에서 접점을 찾을 방법은 없을까.

김동숙 교수는 '민간 혁신과 공공 인프라의 결합'을 해법으로 제시했다. 민간이 구축한 배송·재고 데이터를 국가 공공 정보 인프라와 연계해 의약품 수급 모니터링에 활용하는 것이다.

김 교수는 "데이터가 보이는 구조, 실시간 재고 파악과 물류 정보 통합이 가능한 구조로 가야 공급 안정성과 효율성을 동시에 확보할 수 있다"면서 급선무 정책 과제로는 '차세대 의약품 정보시스템 구축'과 '의료기관·약국의 실제 사용 정보 보고 의무화'를 제시했다.

해외 사례 중 일본을 참고할 만하다는 제언도 나왔다. 일본은 영세 도매업체들이 지주회사 체제로 통합되며 공동 물류 체계를 구축했고, 1970년대 1200여개에 달했던 도매업체 수는 현재 69개 수준으로 줄었다. 권역별 책임 도매가 물류를 담당하고 정부가 정보 허브 역할을 맡는 구조다.

반복되는 필수약 품절은 유통 구조 개선만으로는 해법을 찾기 어렵다. 수익성이 낮아 기업이 생산을 유지하지 못하는 현실을 고려해 공급 기반을 강화해야 한다.

김형식 대한약학회장은 "의약품 유통 효율화를 위해 디지털 전환과 데이터 체계화는 가야만 하는 길"이라며 "이와 함께 생산 지원과 세제 혜택 등을 통해 공급 기반을 강화해야 의약품 공급 불안을 해결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정부도 "도매업계 선진화 필요"…데이터 표준화 논의 첫발

정부도 의약품 유통 체계를 선진화할 필요가 있다는 데 공감했다.

보건복지부 약무정책과 관계자는 "영세 도매상의 난립을 제한하는 등 도매업계 선진화 필요성에 깊이 공감한다"면서도 "현재 구체적인 방안이나 방식이 마련된 단계는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기존 인허가 제도 변경이나 새로운 규제 기준 적용은 의약품 공급망 전체의 안정성과 유통업계에 미치는 영향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복지부는 의약품 물류 효율을 높이기 위해 여러 약상자를 하나의 큰 상자로 묶을 때 부여하는 '묶음번호(어그리게이션·Aggregation)' 표준화 논의를 착수할 예정이다.

현재 묶음번호 제도가 운용되고 있지만, 법적 의무 사항이 아니다. 도매상이 이를 쓰지 않거나 부실하게 처리해도 제재가 없다 보니, 복잡한 도매 유통 과정에서 대량의 약들이 어느 박스에 묶여 어디로 흘러갔는지 추적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있다.

이에 대해 복지부 관계자는 "하반기 제약사 간담회를 통해 묶음번호 표준화 방안에 대한 현장 의견을 수렴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한편, 심평원에 민간 전문가들이 도입을 제안한 '필수 의약품 중심의 의료기관·약국 사용 정보 보고 체계'에 관한 추진 상황을 묻자, 심평원 의약품관리종합정보센터는 "해당 내용은 중장기 과제로 현재 구체적으로 답변할 수 있는 내용이 없다"고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