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품·미용·웰니스 산업을 중심으로 확산해온 '저속노화' 트렌드가 이제 신약 개발 영역으로 번지고 있다. 단순히 노화 속도를 늦추는 수준을 넘어, 이미 노화된 세포를 젊은 상태로 되돌리는 '역노화(rejuvenation)' 기술이 현실화 단계에 접어들면서 제약·바이오 업계의 새로운 격전지로 부상하는 모습이다.

15일 한국바이오협회 바이오경제연구센터에 따르면 미국 바이오기업 라이프바이오사이언스는 세계 최초로 역노화 유전자치료의 인체 임상시험에 착수했다. 노화된 세포의 기능을 젊은 상태로 되돌리는 '부분적 세포 재프로그래밍(partial cellular reprogramming)' 기술을 사람에게 적용하는 첫 사례다.

이번 임상은 손상된 시신경 재생 가능성과 기술의 안전성을 평가하는 것이 목표다. 단순히 노화 지표를 개선하는 데 그치지 않고, 역노화 기술이 실제 질병 치료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검증하는 첫 인체 시험이다.

노화를 질병처럼 관리하려는 움직임이 확산되면서 관련 시장도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시장조사기관 프리시던스 리서치에 따르면 글로벌 항노화 시장 규모는 지난해 779억달러(한화 117조원)에서 2035년 1495억달러(약 224조원)로 두 배 가까이 확대될 전망이다.

그래픽=정서희

국내 제약·바이오 업계도 항노화·역노화 시장 선점을 위한 경쟁에 뛰어들고 있다.

최근 가장 주목받는 분야는 GLP-1(글루카곤 유사 펩타이드-1) 계열 비만 치료제다. 체중 감량과 대사 개선 효과를 통해 노화 관련 질환 예방에도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잇따르면서 항노화 분야의 유력 후보로 떠오르고 있다.

한미약품(128940)은 역노화를 미래 성장동력으로 점찍고 2030년까지 항암·비만·대사질환 중심의 사업 포트폴리오를 항노화·역노화 영역으로 확대할 계획이다. 현재 하반기 출시를 목표로 개발 중인 GLP-1 비만 신약 '에페글레나타이드' 역시 향후 항노화 질환으로의 확대 가능성을 검토 중이다.

세포를 젊은 상태로 되돌리는 '재프로그래밍' 기술에도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대웅제약(069620)은 미국 바이오기업 턴바이오테크놀로지스의 기술 자산과 권리를 확보한 뒤 역노화 치료제 연구개발에 착수했다.

턴바이오의 핵심 기술인 'ERA 플랫폼'은 메신저 리보핵산(mRNA) 기반 리프로그래밍 인자를 활용해 세포의 정체성은 유지하면서 노화로 저하된 기능만 회복시키는 기술이다. 회사는 이를 기반으로 안과·청각질환 등 노화 관련 질환으로 적용 범위를 확대할 계획이다.

지아이이노베이션(358570)은 이미 항노화 임상시험을 진행 중이다. 회사는 면역항암제 후보물질 'GI-102'와 관계사 지아이롱제비티의 마이크로바이옴 후보물질 'GIB-7' 병용요법의 임상 2a상을 한국과 호주에서 수행했다.

지아이이노베이션에 따르면 면역 기능, 근력, 인지 기능 등 노화 관련 생체지표를 평가한 결과 면역·근육 기능, 삶의 질 측면에서 건강수명 연장 가능성을 확인했다. 회사는 이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이달 말 총상금 1500억원 규모의 세계 최대 항노화 경연대회인 '엑스프라이즈 헬스스팬(XPRIZE Healthspan)' 결승 진출에도 도전할 예정이다.

줄기세포를 활용한 노화 극복 연구도 활발하다. 이밖에도 차바이오텍(085660)은 생식기관의 노화 역전과 기능 회복을 목표로 줄기세포 치료제를 개발 중이며, 이엔셀(456070)은 최근 '항노화사업본부'를 신설하고 자가줄기세포 기반 재생의료 사업을 강화하고 있다.

정부도 관련 연구 지원에 나섰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최근 '생체노화 리프로그래밍 원천기술개발사업'을 시작했다. 노화를 질병에 준하는 상태로 정의하고 이를 정량적으로 측정·제어할 수 있는 기술을 확보하는 것이 목표다.

사업은 ▲노화 측정 기술 ▲노화 제어 기술 ▲항노화 기술 효능 평가 등 3개 분야로 구성된다. 정부는 올해부터 2030년까지 총 475억원을 투입해 관련 원천기술 확보와 연구 생태계 구축에 나설 계획이다. 올해 예산은 75억원이다.

이주헌 과기정통부 첨단바이오기술과장은 "노화의 근본 원리를 규명하고 노화된 세포를 젊은 상태로 되돌리는 기술 개발은 초고령사회에 대비하기 위한 핵심 연구개발 과제"라며 "국내 연구진이 세계 최고 수준의 노화 연구 역량을 확보할 수 있도록 지원하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