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이어 유럽까지 동물실험 축소에 나서면서 제약·바이오업계 연구개발(R&D) 전략이 새로운 전환점을 맞았다. 인공지능(AI)과 오가노이드(초소형 인공 장기) 등 비동물 시험기술이 글로벌 신약개발의 핵심 인프라로 자리 잡으면서 국내 기업들도 대응에 속도를 내고 있다.

13일 제약·바이오업계에 따르면 최근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는 의약품을 포함한 화학물질 안전성 평가 과정에서 동물 사용을 단계적으로 폐지하기 위한 로드맵을 발표했다. 비동물 시험법 개발을 확대하고 AI 기반 평가 체계를 구축하는 것이 핵심이다.

챗GPT

◇美·EU 동물실험 축소 본격화…신약개발 패러다임 바뀐다

그동안 신약 개발 과정에서는 쥐·돼지·원숭이 등 다양한 동물이 실험에 활용돼 왔다. 매년 전 세계에서 실험에 사용되는 동물 수는 약 2억 마리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동물실험은 오랫동안 안전성 평가의 기본으로 여겨졌지만 동물과 인간의 생리학적 차이로 인해 실제 임상 결과를 충분히 예측하지 못한다는 한계도 꾸준히 제기돼 왔다.

최근까지도 신약 후보물질 발굴 단계에는 AI가 활용됐지만 약효와 독성 평가 영역은 여전히 동물실험 의존도가 높았다. 그러나 글로벌 규제 기조가 변화하면서 상황도 달라지고 있다.

앞서 미국 식품의약국(FDA)은 현대화법(FDA Modernization Act) 2.0을 통해 신약 개발 과정에서 동물실험 대신 다양한 대체시험법을 활용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했다. 올해에는 오가노이드와 장기칩, 컴퓨터 기반 독성·안전성 평가 활용 확대 방침도 내놨다. 장기칩은 사람 장기의 구조와 기능을 작은 칩 위에 구현한 실험 플랫폼이다.

여기에 지난달 미국 하원에서는 연구 목적의 영장류(원숭이) 수입을 금지하는 법안까지 발의되면서 동물실험 축소 기조가 더욱 뚜렷해지고 있다.

업계에서는 이를 단순한 동물복지 강화 차원이 아닌 신약개발 패러다임 전환으로 해석한다. 글로벌 규제기관들이 비동물 시험법을 선택이 아닌 필수 역량으로 규정하기 시작하면서 관련 기술 확보 여부가 향후 신약개발 경쟁력을 좌우할 핵심 요소로 떠오르고 있다는 분석이다.

◇엔비디아부터 릴리, 삼성바이오까지…"대안은 AI·오가노이드"

특히 AI는 후보물질 발굴을 넘어 신약개발 전 과정으로 활용 범위를 빠르게 넓히고 있다. 글로벌 빅테크 기업 엔비디아와 미국 제약사 일라이 릴리는 올해 1월 JP모건 헬스케어 콘퍼런스(JPM 2026)에서 AI 기반 신약개발 공동 연구소 설립 계획을 발표했다. 엔비디아의 바이오 특화 플랫폼 '바이오니모(BioNeMo)'를 활용해 단백질 구조 분석부터 후보물질 발굴, 로봇 실험실 구축, 연구 자동화까지 추진한다는 구상이다.

릴리가 수십 년간 축적한 연구 데이터를 바탕으로 구축한 AI 신약개발 플랫폼 '튠랩(TuneLab)'도 주목받고 있다. 국내에서는 아리바이오와 파로스아이바이오(388870) 등이 튠랩 고도화 작업에 참여한다.

최근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의 방한 이후 관심이 높아진 피지컬 AI와 로보틱스 기술도 신약개발 분야로 확산되는 분위기다. 연구자가 수행하던 반복 실험을 자동화하고 AI가 실험 설계와 데이터 분석을 담당하는 차세대 연구 환경 구축이 본격화하고 있다.

오가노이드와 장기칩 분야도 새로운 성장 기회를 맞고 있다. 오가노이드사이언스(476040), 티앤알바이오팹(246710), 넥셀 등 국내 기업들은 관련 플랫폼을 개발해 왔지만 시장 규모는 제한적이었다. 그러나 미국과 유럽 규제기관이 비동물 시험법 확대에 나서면서 기술 상용화와 시장 확대 속도 역시 빨라질 것으로 전망된다.

미국 보스턴에서 열린 바이오USA에 참가한 이상명 삼성바이오로직스 사업전략팀장(상무)이 17일(현지 시각) 기자들과 만나 '삼성 오가노이드' 관련 내용을 발표하고 있다. /삼성바이오로직스

국내 바이오기업들도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삼성바이오로직스(207940)는 지난해 6월 '삼성 오가노이드' 플랫폼과 함께 개발 적합성 평가 플랫폼 '디벨롭픽(DEVELOPICK®)'을 활용한 항암 신약 개발 전략을 선보였다. 환자 유래 종양 오가노이드를 활용해 항암제 후보물질의 효능을 검증하는 위탁개발(CDO) 서비스다.

HLB도 바스젠바이오와 손잡고 AI와 동물대체시험법을 결합한 비임상 서비스 개발에 착수했다. 업계에서는 글로벌 규제 변화가 본격화될수록 AI와 오가노이드, 장기칩을 결합한 신약개발 플랫폼 경쟁이 더욱 치열해질 것으로 보고 있다.

HLB(028300)도 바스젠바이오와 손잡고 AI와 동물대체시험법을 결합한 비임상 서비스 개발에 착수했다. 업계에서는 글로벌 규제 변화가 본격화될수록 AI와 오가노이드, 장기칩을 결합한 신약개발 플랫폼 경쟁이 더욱 치열해질 것으로 보고 있다.

정부도 관련 지원을 확대하고 있다. 보건복지부와 한국제약바이오협회는 371억원 규모의 'K-AI 신약개발 전임상·임상 모델 개발 사업'을 추진 중이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도 향후 4년간 225억원을 투입해 오가노이드와 동물실험 간 약물 반응 차이를 예측하는 AI 기술 개발과 신약 후보물질 발굴 지원에 나설 계획이다.

AI·오가노이드 신약개발 플랫폼을 개발 중인 국내 바이오텍 관계자는 "과거에는 동물실험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수행하느냐가 경쟁력이었다면 앞으로는 AI와 오가노이드 기반으로 얼마나 정확하게 인간의 약물 반응을 예측하느냐가 핵심이 될 것"이라며 "글로벌 규제 변화는 국내 기업들에게도 새로운 성장 기회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