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 치료의 가장 큰 적은 재발이다. 수술과 항암 치료를 마친 뒤에도 영상 검사로 확인되지 않는 미세 암세포가 몸속에 남아 있다가 자라는 경우가 적지 않다. 글로벌 의학계가 '암 백신'에 주목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숨은 암세포를 제거해 재발을 막으려는 치료 전략이다.
하지만 20년 넘게 암 백신 개발은 번번이 실패했다. 가장 큰 이유는 면역체계가 공격해야 할 암세포의 표적을 정확히 찾아내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환자마다 암세포의 유전적 특성이 달라 획일적인 효과를 내는 데도 한계가 있었다.
그런데 최근 제약업계가 인공지능(AI)과 차세대 유전체 분석 기술, 메신저리보핵산(mRNA) 기술을 활용해 돌파구를 찾고 있다. 이에 따라 암 백신이 개념 검증 단계를 넘어 상용화 기대도 커지고 있다.
지난달 29일부터 이달 2일(현지 시각)까지 미국 시카고에서 열린 미국임상종양학회(ASCO 2026)에서는 이러한 가능성을 보여주는 연구 결과가 공개됐다.
미국 제약사 MSD와 모더나는 공동 개발 중인 개인맞춤형 암 백신 '인티스메란 오토진(Intismeran Autogene·mRNA-4157/V940)'의 5년 장기 추적 결과를 발표했다.
고위험 흑색종 환자에서 면역항암제 키트루다와 병용 투여한 결과 재발 또는 사망 위험은 49%, 원격 전이 또는 사망 위험은 59%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암 백신은 독감이나 코로나19 백신처럼 질병 발생을 예방하는 백신과는 다르다. 이미 암이 발생한 환자를 대상으로 면역세포가 암세포를 더 효과적으로 공격하도록 돕는 치료제에 가깝다.
인티스메란 오토진은 현재 상용화에 가장 근접한 후보로 평가된다. 환자 종양의 유전정보를 분석한 뒤 AI를 활용해 암세포에만 존재하는 돌연변이 항원(네오안티젠)을 선별하고, 이를 최대 34개까지 담아 제작하는 방식이다. 면역세포가 암세포를 정확히 인식하도록 유도하는 방식으로 키트루다와 병용 개발되고 있다.
AI와 유전체 분석 기술이 발전으로 암 백신 개발도 전환점을 맞았다는 평가가 나온다. 환자의 종양을 분석해 암세포에만 존재하는 돌연변이를 찾아낼 수 있게 됐고, AI가 수많은 돌연변이 후보 가운데 실제 면역반응을 유도할 가능성이 높은 표적을 골라내는 역할을 맡고 있다.
코로나19 대유행을 거치며 상용화된 mRNA 기술도 암 백신 개발에 속도를 붙였다. mRNA는 환자별 종양에서 발견된 돌연변이 항원 정보를 비교적 빠르게 백신으로 구현할 수 있어 개인맞춤형 치료 전략을 현실화할 수 있게 됐다는 평가다.
이에 기업들도 암 백신 개발에 잇따라 뛰어들고 있다.
독일 바이오엔테크와 스위스 로슈는 췌장암과 대장암 겨냥한 개인맞춤형 암 백신 후보물질 'BNT122'를 개발 중이다. 초기 연구에서 백신에 반응한 환자군에서 재발 없는 생존 기간이 더 길게 나타나 후속 임상을 진행 중이다. 2015년 설립된 스위스 바이오기업 누스콤(Nouscom)은 유전적으로 암 발생 위험이 큰 린치증후군 환자를 대상으로 암 예방 백신을 개발에 도전했다.
물론 암 백신 상용화까지 넘어야 할 산도 만만치 않다. 환자마다 백신을 개별 제작해야 하는 만큼 제조 비용과 생산 기간 문제가 있다. 어떤 암종에서 가장 큰 효과를 낼 수 있을지 추가 검증도 필요하다.
그럼에도 글로벌 제약업계와 의학계가 가능성에 주목하는 이유는 과거에는 모든 환자에게 같은 백신을 투여했다면, 이제는 AI와 유전체 분석 기술을 활용해 환자별 암세포의 약점을 정밀하게 공략하는 단계로 진화했기 때문이다.
미국 다나파버 암연구소의 암 백신 권위자인 패트릭 오트 교수는 지난 3월 네이처 바이오테크놀로지 기고문에서 "유전체 분석 기술과 항원 예측 알고리즘, mRNA 전달 플랫폼의 발전이 네오안티젠 암 백신의 임상 개발을 가능하게 했다"고 평가했다.
국내에서도 관련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다만 글로벌 빅파마들이 후기 임상 단계에서 경쟁하는 것과 달리 국내는 플랫폼 구축과 초기 연구개발 단계다. 국내 바이오기업들이 참여한 'NeoVax-K 컨소시엄'이 보건복지부의 한국형 ARPA-H 프로젝트를 통해 환자 맞춤형 mRNA 항암백신 개발에 나섰다.
주관기관인 애스톤사이언스를 중심으로 테라젠바이오, 아이엠비디엑스(461030), 진에딧, 고려대안암병원 등이 참여해 췌장암과 대장암, 소아·청소년 암 등을 대상으로 맞춤형 암 백신 플랫폼 구축을 추진 중이다.
업계에서는 암 백신 시대가 본격화할 경우 치료제뿐 아니라 AI 기반 유전체 분석, 정밀 진단, mRNA 생산 기술 분야도 함께 성장할 것으로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