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쪽에서는 전신마취제와 마약류 의약품이 통제 없이 불법 유통되고, 다른 한쪽에서는 아이들의 해열제가 없어 품절 대란이 번진다. 겉보기엔 별개의 사건처럼 보이지만, 제약 업계와 전문가들은 국내 의약품 공급망의 '정보 불투명성'이 낳은 결과라고 지적한다. 생산을 늘려도 현장에서는 약이 사라지는 아이러니, 그 중심에는 3500여 개 업체가 난립해 재고를 묶어두는 기형적인 유통 구조가 있다. 전·현직 업계 관계자들을 만나 곪아 터진 국내 의약품 유통 체계의 구조적 허점과 해법을 심층 취재했다. [편집자 주]

서울 시내의 한 약국에서 시민들이 약을 처방받고 있다./뉴스1

2018년 여름, 전국 약국에서 고혈압 치료제 '발사르탄' 수백만 정이 긴급 회수됐다. 중국산 원료에서 발암 가능 물질(NDMA)이 검출된 데 따른 조치였다. 정부와 제약업계가 일제히 회수에 나섰지만, 약이 실제로 어떤 환자에게까지 전달됐는지 정확히 특정하는 데 한계를 드러냈다.

당시에도 의약품마다 고유 번호를 부여해 생산과 유통 이력을 관리하는 '의약품 일련번호 제도'가 시행되고 있었지만, 현장에서 환자 단위까지 추적하는 것은 어려웠다.

전·현직 제약업계 관계자와 전문가들은 이를 두고 "데이터가 이어지지 않는 구조적 문제"라고 지적한다. 공급망 단계의 정보와 의료기관 사용 정보가 각각 따로 관리되면서, 의약품의 전체 흐름이 하나의 체계로 연결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일련번호 있는데 약 추적 흐름 끊기는 이유

의약품 일련번호 제도는 제약사가 최소 포장 단위마다 고유 번호를 붙이고 출하 정보를 보고하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도매업체도 입출고 단계에서 이를 관리한다.

오남용 우려, 위조 방지, 안전성 문제 발생 시 신속한 추적·회수가 필수적인 전문의약품(ETC)이 일련번호 적용 대상이다. 의사 처방 없이 약국에서 소비자가 직접 구매할 수 있는 일반의약품(OTC)은 의무 대상이 아니다.

그런데 이 기록이 병원과 약국을 지나면서 끊긴다. 병의원·약국 등은 제약사·도매업체와 동일한 수준의 일련번호 보고 의무가 없기 때문이다.

대신 건강보험심사평가원(심평원)은 의료기관과 약국의 보험 청구 데이터를 통해 의약품 사용량을 파악한다. 이 정보는 환자 진료와 급여 관리를 위한 사용 실적 데이터로, 공급망 단계의 일련번호 정보와 직접 연결되지 않는다.

의약품 뒷면에 기재된 13자리 일련번호. 의약품유통이력 추적제도에 따라 일련번호를 조회하면 의약품을 유통·거래한 사람을 추적할 수 있다./서울시

결국 생산·유통 단계와 실제 사용 단계의 정보가 각각 따로 움직이면서, 의약품의 흐름을 하나의 경로로 이어 쫓는 데 어려움이 있는 것이다.

약국의 조제 방식도 유통 추적에 영향을 준다. 약국은 상자 단위로 약을 받지만, 실제 투약은 낱알 단위로 나뉘어 이뤄진다. 의약품 상자마다 고유의 일련번호가 붙어 있어 도매상까지는 이동 경로가 추적되지만, 약사가 처방전에 맞춰 상자를 뜯고 낱알로 조제하는 순간 그 일련번호와 환자 사이의 연결 고리가 사라진다.

물류 효율을 높이기 위해 여러 약 상자를 큰 박스에 담을 때 부여하는 '묶음번호(어그리게이션, Aggregation)' 제도도 구멍이 있다. 현재 의약품 묶음번호 도입은 법적 강제 사항이 아니다.

제약사나 도매상이 이를 쓰지 않거나 부실하게 처리해도 제재가 없다 보니, 복잡한 도매 유통 과정에서 대량의 약들이 어느 박스에 묶여 어디로 흘러갔는지 실시간으로 추적하는 데 한계가 따를 수밖에 없다.

이 같은 구조는 2018년 발사르탄 사태에서도 드러났다. 회수 대상 의약품의 유통 경로는 확인할 수 있었지만, 개별 환자 단위까지 특정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당시 보건당국은 해당 의약품을 취급한 의료기관 중심으로 회수, 복용 중단 조치를 진행했다.

이런 구조의 취약점은 의약품 회수뿐 아니라 현장 수급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한 제약사 관계자는 "제약사의 공급량과 약국의 처방량을 비교하면 공급량이 훨씬 많은 달이 있다"며 "출하 데이터상으로만 보면 절대 부족할 수준이 아닌데 왜 약국에서 부족하다고 하는지 궁금해도 궁극적 원인은 찾을 수 없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김동숙 국립공주대 보건행정학과 교수는 "현재의 시스템은 제약사에서 도매상, 의료기관으로 넘어가는 '공급 데이터'만 보여줄 뿐, 실제 환자에게 어떻게 쓰이고 어디에 묶여 있는지 파악하는 '사용 데이터'와는 단절돼 있다"고 짚었다.

김 교수는 "공급과 사용이라는 두 축의 데이터가 연동되지 않다 보니, 수급 불안정이 발생해도 어느 단계에서 병목현상이 생겼는지 원인 규명조차 못 하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그래픽=손민균

◇추적 가능한 마약류, 내부서 새는 통제망

마약류 의약품은 다른 일반 의약품과 달리 유통 전 과정을 추적할 수 있는 시스템 안에 있다.

식품의약품안전처(식약처)는 마약류 통합 관리시스템(NIMS)을 통해 제조·수입 단계부터 병원과 약국의 사용 단계까지 전 과정을 관리한다. 병원과 약국은 취급량과 재고, 투약 내역까지 보고해야 하고, 위반 시 업무정지 등 처분을 받는다. 일정 수준의 수가를 책정해 보고 행위에 대한 보상도 제공한다.

하지만 이런 시스템이 있어도 프로포폴 등 마취제와 향정신성의약품을 포함한 마약류 의약품 유출·오남용 사고는 계속되고 있다. 그 이유는 제도 밖이 아니라 '내부 관리'에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의료기관 내부에서 허위 또는 부정확한 보고가 이뤄지거나, 보관 관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경우, 일부 인력에 의한 무단 반출 등으로 내부 통제망이 무너진 것이다.

지난 2월 25일 오후 8시 44분쯤 서울 반포대교에서 주행하던 포르쉐 차량이 강변북로를 주행 중이던 벤츠 차량 위로 떨어진 뒤 잠수교까지 추락해 운전자를 포함한 2명이 다치고 차량 4대가 파손되는 사고가 발생했다. 서울 용산경찰서는 사고를 낸 포르쉐 차량에서 프로포폴 주사제와 진정마취용 약물, 일회용 주사기 등을 발견하고 운전자인 30대 여성 A 씨를 이날 자정 40분쯤 긴급체포했다./용산소방서

지난 2월 서울 반포대교에서 발생한 포르쉐 추락 사고 차량에서도 프로포폴 등 진정 마취제와 주사기가 발견됐다. 해당 약물은 의료기관에서 처방 이력이 확인된 마약류 의약품이었다. 경찰에 따르면 운전자는 서울 강남의 성형외과 간호조무사로부터 해당 약물을 공급받은 것으로 조사됐다.

이런 문제가 잇따르자, 식약처도 관리 강화에 나섰다. 지난 9일 식약처는 마약류 취급자에게 종업원 관리·감독 의무를 강화하고, 위반 시 행정처분 수위를 상향하는 내용을 담은 '마약류 관리에 관한 법률 시행령·시행규칙' 개정안을 입법 예고했다. 개정안에는 도난·유출 방지를 위한 관리 책임을 명확히 하고, 위반 시 업무정지 처분 기준을 강화하는 내용 등이 포함됐다.

익명을 요구한 의료계 관계자는 "마약류가 컴퓨터 화면상에서는 완벽하게 추적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현장에서 의사가 투약 장부를 가짜로 적거나 직원이 약을 몰래 빼돌리는 불법 행태까지는 잡아내지 못한다"며 "통제에 명백한 한계가 있다"고 짚었다. 그는 "전문의약품(처방약)도 병원과 약국 문턱을 넘는 순간부터 그 약이 실제로 누구에게 갔는지, 어느 창고에 있는지 추적할 길이 없는 암흑지대가 된다"고 말했다.

한 제약사 직원은 "마약류도 식약처가 투약 단계까지 옭아매도 내부 허위 보고나 무단 반출 같은 구멍이 생기는데, 감시망이 더 느슨한 의약품의 수급이나 재고 관리는 오죽하겠냐"라며 반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