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쪽에서는 전신마취제와 마약류 의약품이 통제 없이 불법 유통되고, 다른 한쪽에서는 아이들의 해열제가 없어 품절 대란이 번진다. 겉보기엔 별개의 사건처럼 보이지만, 제약 업계와 전문가들은 국내 의약품 공급망의 '정보 불투명성'이 낳은 결과라고 지적한다. 생산을 늘려도 현장에서는 약이 사라지는 아이러니, 그 중심에는 3500여 개 업체가 난립해 재고를 묶어두는 기형적인 유통 구조가 있다. 전·현직 업계 관계자들을 만나 곪아 터진 국내 의약품 유통 체계의 구조적 허점과 해법을 심층 취재했다. [편집자 주]
2007년 영국에서 흥미로운 실험이 시작됐다. 화이자가 자사 의약품을 도매상을 거치지 않고 직접 약국으로 배송하기 시작했다. 이른바 DTP(Direct to Pharmacy) 모델이다. 도매상은 배송 서비스를 제공하는 물류 업체로 역할이 바뀌고, 행위별 수가 형태로 이윤을 얻는 구조가 됐다.
2008년 한국 정부는 의약품 공동물류센터 법제화를 추진했다. 제약사와 도매업체가 물류를 공동으로 운영할 수 있도록 약사법 개정안을 마련했다. 하지만 법안은 의결되지 못하고 사라졌다.
세계 의약품 유통 시장이 지난 19년 동안 효율화와 대형화가 이뤄진 동안, 한국은 답보 상태다. 국내에선 해마다 주요 의약품의 품절 대란과 마약류 의약품 분실 사고 등의 부작용이 터져 나왔다.
한국의 의약품 유통 구조에 대해 김형식 대한약학회장(성균관대 약학대학 교수)은 "기형적"이라며 "도매상이 난립하고 최근엔 영업 대행사(CSO) 위탁 운영까지 확대돼, 유통 경로와 관리 주체가 파편화돼 불법 유통이나 비정상 거래 등 부작용이 더 늘어날 수 있다"고 진단했다.
◇ 미국·유럽은 대형화, 일본은 94% 정리…한국만 역주행
미국은 맥케슨, 카디널헬스, 센코라(옛 아메리소스버겐) 3개 대형 도매업체가 약 500조원 규모 시장을 사실상 장악하고 있다. 전문의약품은 별도의 전문 도매업체가 담당하는 구조로 분화됐다.
2015년 기준 유럽은 EU 26개국과 노르웨이·스위스를 포함해 752개의 대형 도매업체가 운영된다. 국가별로 보면 독일 5개, 프랑스 3개, 영국 3개의 전국 단위 대형 업체가 있다. 영국의 경우 DTP 모델이 정착됐고, 제약사가 직접 배송하되 도매상은 물류 대행사로 기능하는 RWA(Reduced Wholesale Arrangements) 방식도 등장했다.
일본이 가장 극적이다. 1970년대 1200개가 넘었던 도매업체 수는 1986년 440개, 1991년 375개로 줄더니 2014년 83개, 2023년에는 69개까지 내려왔다. 50년 만에 94%가 사라진 것이다.
같은 기간 한국은 정반대 방향으로 달렸다. 2000년 518개였던 도매업체는 2023년 3516개로 늘었다. 23년 만에 약 7배 폭증이다.
일본 정부는 1990년대 의료비 억제정책을 폈다. 약가를 지속적으로 인하하니 도매상의 수익률이 줄었다. 경영 압박을 받은 소규모 업체들은 스스로 합병을 택하거나 대형 업체에 흡수됐다.
1991년에 도입한 '신구입가제도'도 큰 역할을 했다. 기존에는 의료기관이 제조사와 직접 가격을 교섭하고 납품할 도매업체를 지정하는 구조였다. 이를 폐지하고 가격 교섭권을 도매상에게 넘겼다. 도매상의 자율성이 커지자 자체적인 경쟁력 강화와 합병이 가속됐다.
현재 일본 7대 도매사가 전체 의약품도매시장 매출액의 75% 내외를 점유한다. 2022년 기준 이들의 평균 유통 수수료율(마진율)은 7.20%다.
◇한국 유통 수수료율 6~9%…전문가 "4%는 거품"
미국의 유통 수수료율은 약 4% 수준이다. 미국 도매상은 물류만 한다. 영업대행, 판촉, 정보 수집 같은 부가 서비스를 제공하지 않는다. 일본의 7%대는 물류에 더해 의사·약사 대상 판촉, 안전성 정보 수집 제공, 지역 처방·재고 정보 제공 등 종합적인 서비스를 포함한 수치다.
한국의 경우는 연구마다 다르지만 6~9% 수준으로 추산됐다. 미국처럼 물류만 하는 것도 아니고, 일본처럼 고부가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도 아닌 어중간한 상태에서 수수료가 붙어 이윤을 나누는 구조다.
이재현 성균관대 제약산업학과 교수는 한국의약품유통협회 연구용역 보고서에서 "국내 의약품 유통 구조에는 약 4% 수준의 비효율 비용이 존재한다"고 분석했다.
다단계 유통과 영업대행(CSO) 비용 등이 누적되면서 발생하는 비용으로, 결국 약가와 건강보험 재정, 즉 국민 부담으로 이어진다는 의미다.
구조 개선 시도를 할 때마다 도매업계의 반발로 제동이 걸렸다. 2000년대 초, 정부는 의약품유통종합정보시스템을 구축하고 모든 유통 단계를 투명화하려 했다. 하지만 "과잉규제"라는 비판이 이어졌고, 요양기관이 거래내역 공개에 거부감을 보이면서 시스템은 참여율 저조로 운영이 중단됐다.
2001년에는 150개 업체가 공동 출자해 의약품물류협동조합을 설립하고, 경기도 안성에 공동물류센터 부지까지 매입했으나 이해관계 조율에 실패하고 2004년 청산됐다. 2015년에는 한미사이언스(008930)가 '온라인팜(HMP몰)'을 통해 온라인 플랫폼 기반 의약품 유통에 뛰어들었다. 이때도 도매업계는 "생태계를 위협한다"며 반발했고 기업이 한발 물러서면서 갈등이 일단락됐다.
◇부처 간 권한 쪼개져 실종된 사령탑
한국의 의약품 유통 구조의 진단명이 뚜렷한데도 처방과 치료가 지지부진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전문가들은 문제를 해결할 주체와 이해관계자를 조율할 구조가 없기 때문이라고 꼬집었다.
한국은 제약사, 도매상, 병원, 약국 사이의 이해관계를 조율하는 컨트롤타워가 불명확하다. 약가 정책과 유통 수익 구조를 총괄하는 보건복지부, 허가와 품질 관리를 맡은 식품의약품안전처, 현장 감시 권한을 가진 지자체 등으로 영역과 권한을 분리하고 있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심평원)은 2024년 관련 연구용역 보고서를 통해 허가기준 강화, KGSP(의약품 유통 품질관리기준) 사후관리 강화, 도매업체 등급제, 전자상거래 의무화 등 해결책을 제안 받았다. 2007년 보고서와 거의 같은 내용이지만 지금까지 실행된 항목은 없다.
해당 연구를 이끈 김동숙 국립공주대 보건행정학과 교수는 "의약품 시장은 정보 비대칭성이 커 가격·품질 경쟁이 직접 작동하기 어렵다"며 "특정 도매업체에서만 독점 취급하는 의약품이 있어 이해관계자를 설득하기 어렵고, 소상공인 생계 문제도 있어 정부가 규제를 강화하기 쉽지 않다"고 분석했다.
이어 "의약품 공급내역 데이터를 보유한 기관이 정보 허브 역할을 하되, 품질·허가·사후관리 권한을 가진 기관들과 책임과 권한을 명확히 배분하는 거버넌스(협의체)가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그러면서 우선 "차세대 의약품정보시스템 플랫폼을 실현해 공급망 전반의 데이터를 투명하게 공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심평원 의약품관리종합정보센터는 이와 관련해 "지난해 11월 의약품정보시스템을 클라우드 플랫폼으로 전환했다"며 "이를 바탕으로 유통정보 관리 체계를 고도화하고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기반은 강화하고 있다는 의미다. 그러나 완벽한 수급 예측을 위해 가장 시급한 과제로 꼽히는 '현장 데이터 연동'까지는 갈 길이 멀다는 지적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