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쪽에서는 전신마취제와 마약류 의약품이 통제 없이 불법 유통되고, 다른 한쪽에서는 아이들의 해열제가 없어 품절 대란이 번진다. 겉보기엔 별개의 사건처럼 보이지만, 제약 업계와 전문가들은 국내 의약품 공급망의 '정보 불투명성'이 낳은 결과라고 지적한다. 생산을 늘려도 현장에서는 약이 사라지는 아이러니, 그 중심에는 3500여 개 업체가 난립해 재고를 묶어두는 기형적인 유통 구조가 있다. 전·현직 업계 관계자들을 만나 곪아 터진 국내 의약품 유통 체계의 구조적 허점과 해법을 심층 취재했다. [편집자 주]

경찰이 적발한 에토미데이트./서울경찰청 마약범죄수사대 제공

사례 1. 지난 3월 식품의약품안전처 산하 부산지방식약청은 전문의약품을 불법 유통한 40대 남성 A씨와 의약품 도매상 대표 등 6명을 약사법 위반 혐의로 검거했다. 이들은 '제2의 프로포폴'이라 불리는 전신마취 유도제 에토미데이트와 근육 강화 스테로이드를 4년간 1만2155회에 걸쳐 44억원어치 판매한 혐의를 받는다. 에토미데이트만 1600박스, 32만명이 투약할 수 있는 규모다.

사례 2. 지난해 11월, 독감과 감기 유행으로 어린이 호흡기질환 환자가 증가하면서, 소아용 해열진통제의 품절 상태가 한 달째 이어졌다. 정부가 생산 확대와 수입 허가 등 대책을 내놓지만 매년 반복되는 일이다.

겉보기에 하나는 불법 유통 범죄이고 다른 하나는 의약품 수급 문제이지만, 제약 업계와 전문가들은 두 현상의 '뿌리'가 같다고 지적한다. 바로 의약품 유통 구조다. 다단계로 복잡하게 꼬여 있고 추적이 어려운 구조적 허점을 파고든 불법 유통과 의약품 품절 대란이 발생하고 있다는 것이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의 연구용역 과제 '의약품 유통 선진화를 위한 유통체계 개선방안 연구'를 수행한 김동숙 국립공주대학교 보건행정학과 교수는 "한국 의약품 유통 구조 문제의 본질은 정보의 불투명성"이라고 진단했다.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소속 백종헌 국민의힘 의원은 "마약류 의약품 관련 도난·분실 사고가 지속적으로 늘고 있음에도 병원, 도매업체, 약국 등 유통 전반에 걸쳐 관리 체계가 미흡한 실정"이라며 "특히 재고 관리와 보관, 운송 단계에서 사각지대가 존재한다"고 지적했다.

그래픽=정서희

◇700곳에서 3500곳으로…제도가 키운 도매상

국내 의약품 유통 구조는 제약사→다수 도매→약국으로 이어지는 다단계 구조다.

의사의 처방과 약사의 조제를 분리한 '의약분업' 이후, 국내 의약품 유통은 도매 중심 구조로 빠르게 재편됐다. 제약사가 약국과 직접 거래하기 어려워지면서 도매 거래 비중은 2001년 45.1%에서 2022년 89.5%까지 확대됐다.

특히 도매업 진입 규제가 완화하면서, 도매업체 수는 급격히 불어났다. 2000년 700여곳 수준이던 의약품 도매업체는 규제 완화 이후 3500곳 이상으로 증가했다.

규제 폐지와 부활, 기준 완화를 거쳐 자리 잡은 현행 의약품 도매업 허가 기준은 '창고 면적 165㎡(50평), 자산 5억원, 관리약사 고용'이다. 다만, 800㎡ 이상 창고를 보유한 도매업체에 물류를 위탁할 경우 자체 창고 없이도 영업할 수 있다. 이른바 '위탁 도매상'이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용역 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2022년 기준 국내 의약품 공급업체는 3987개, 이 가운데 의약품 도매상은 3503개에 달한다.

도매 업체가 난립하면서 유통 구조가 더 복잡해졌다. 약국에 의약품을 공급하는 일반도매, 병원 납품을 담당하는 간납도매를 비롯해 전납도매와 품목도매 등이 얽혀 있다. 전납도매는 특정 병원에 의약품을 독점 공급하는 형태다. 해당 병원에 납품하려면 사실상 해당 도매상을 거쳐야 한다. 품목도매는 특정 제약사의 특정 품목 유통권을 확보해 공급하는 구조다.

2000년 5월 정부가 기존 의약품 도매업 허가 창고 시설 기준을 폐지하면서, 창고 없이도 허가를 받을 수 있게 됐다. 그 결과 2000년 700여개였던 도매업체는 2006년 1700여개로 7년 만에 두 배 이상 증가했다. 영세 업체가 난립하면서 물류 비효율과 품질관리 문제가 불거지자, 정부는 2011년 창고 면적 기준을 부활시켰다. 하지만 업계가 반발했고, 결국 정부는 2015년 다시 기준을 완화했다./그래픽=정서희

◇돌고 도는 藥…추적 시스템 단절

도매업체가 난립하고 도매업체 간 재판매, 이른바 '도도매'가 반복되면서 재고가 어느 단계에, 얼마나 있는지 파악하기가 어려운 실정이다.

익명을 요구한 제약업계 관계자는 "과거에는 의약품이 제약사(생산·제조사)에서 최종 약국까지 가는 과정에서 도매상 간 거래가 7~8단계까지 이르는 경우도 있다"며 "단계가 늘수록 중간 이윤(마진)이 붙고, 재고 위치 추적도 어렵다"고 말했다.

그는 "의약품 변질, 훼손 등에 관한 책임도 불분명해진다"며 "제약사는 분명 정상 출하했는데도, 중간 유통 과정에서 무엇이 문제였는지 끝내 확인할 방법이 없다"고 토로했다.

이런 문제에 대해 김동숙 교수는 "현재 의약품을 직접 보관·배송하지 않는 위탁형 또는 서류상 유통업체가 늘면서 실질적인 물류 기능과 유통 책임이 약화할 수 있는 구조가 형성됐다"고 진단했다.

김형식 대한약학회장(성균관대 약대 교수)은 "국내 시장 규모 면에서 봐도 국내 제약사가 500곳이 안 되는데 도매업체 수는 3500곳으로 지나치게 많고 영세 업체 비중이 커 기형적"이라며 "이는 유통 효율 저하뿐 아니라 리베이트 같은 부작용으로 유통 질서를 왜곡할 수 있는 요인"이라고 설명했다.

서울시 종로구에 있는 한 약국 출입문에 감기약 품절 안내문이 붙어있다./뉴스1

정부는 의약품 일련번호 제도와 공급 단계 보고 시스템을 도입해 생산부터 도매 단계까지 추적 체계를 구축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의료기관과 약국에서 처방·조제된 내역(실제 사용량)은 보고되지 않는다. 이에 실질적인 재고 추적이 안되고 있다.

이 때문에 2018년 '발사르탄 사태'처럼 유통된 의약품이 어느 환자에게 투약됐는지 끝내 확인하지 못한 사례도 발생했다. 일련번호가 있음에도 약국 단계에서 조제 과정이 개별 단위로 분해되면서 추적이 끊긴 결과다.

◇쟁여두고, 끼워팔고…현장엔 왜 없나

이런 추적 관리 사각지대를 악용한 불법 판매, 대리 처방, 불법 시술 문제도 계속 생겨나고 있다.

2023년 1월 경기 고양의 한 의약품 도매업체가 약사 면허를 불법으로 빌려 의약품을 유통한 사실이 드러났다. 상주 약사 없이 수면마취제 '프로포폴'과 향정신성의약품까지 일반 직원이 반출한 것으로 조사됐다. 마취제와 향정신성의약품이 통제 없이 유통된 셈이다.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백종헌 의원실에 식품의약품안전처가 제출한 자료를 분석한 결과, 2020년부터 2024년까지 5년간 도난되거나 분실 신고된 의료용 마약류 총량만 5만6718개에 달했다. 가장 많이 사라진 약은 불안증 등에 쓰이는 '디아제팜'이었다. 뒤이어 '알프라졸람', '로라제팜', 수면제인 '졸피뎀' 등 오남용 위험이 큰 향정신성의약품이 상위를 차지했다.

주목할 점은 병원뿐 아니라 도매업체와 약국 등 '중간 유통·조제 단계'의 사고 증가세가 압도적이라는 사실이다. 의약품 도매상 내 마약류 사고는 2020년 153건에서 2024년 265건으로 73% 급증했고, 약국은 같은 기간 88건에서 149건으로 69% 늘어났다.

해마다 반복되는 의약품 품절 사태 역시 단순히 생산 부족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고 업계 관계자들은 지적했다. 약 수요가 급증하는 시기에 도매 단계에서 재고가 선점되거나 거래 조건에 따라 물량이 묶이는 사례도 있다는 것이다.

한 업계 관계자는 "소아과 성수기처럼 특정 품목 수요가 몰리는 시기에는 약국이나 병원이 도매상에 주문을 넣어도 원하는 품목만으로는 물량을 받기 어려운 경우가 있다"며 "일정 물량 이상을 함께 주문해야 거래가 성사되는 조건이 붙기도 한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해열제 300개를 주문하면 판매가 잘 안되는 다른 약을 함께 묶어 공급하는 이른바 '끼워팔기'를 하는 식이다.

제약사가 생산 물량을 늘려 공급해도 약국에서는 약을 확보하지 못하는 경우도 발생한다. 한 제약사 관계자는 "공장을 완전 가동해 물량을 풀어도 도매 단계 어딘가에서 막힌다"며 "공급은 됐지만 현장에서는 사라진 것처럼 보이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생긴다"고 말했다.

반품 처리 과정도 비효율적이라는 지적이다. 약국에서 반품된 의약품은 도매상을 거쳐 제약사로 회수되는 구조인데, 장기간 창고에 적체됐다가 유효기간이 지나 폐기되는 사례가 적지 않다는 것이다.

한 도매업체 관계자는 "반품 기준이 제약사마다 달라 수십억~수백억원 규모의 재고가 창고에 쌓이기도 한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의약품 유통 체계를 손보고 정보의 투명성을 강화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김동숙 교수는 "한국이 세계 최초로 의약품 일련번호 제도를 도입했음에도 유통 구조가 복잡한 탓에 재고 흐름이 왜곡되는 문제가 있다"며 "도도매 구조로 인한 재고 불균형이 품절 체감을 키우는 요인"이라고 분석했다.

이어 그는 "재고 관리 실패와 반품으로 버려지는 의약품은 사회적 낭비이자 건강보험 재정, 환경 측면에서도 개선이 시급한 과제"라고 지적했다.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소속 백종헌 의원(국민의힘)은 "의료용 마약류 사고와 도난을 예방하려면 공급망 전 과정의 관리 체계를 강화해야 한다"며 "취급자 교육 확대와 신속한 사고 대응 시스템 구축 등 종합적인 개선 방안도 시급하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