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립 100주년을 맞은 유한양행(000100)이 연구개발(R&D) 조직과 신약 개발 전략을 전면 재편하고 있다. 단순히 후보물질(파이프라인)을 개발해 기술 수출하는 수준을 넘어 글로벌 공동 개발·인공지능(AI)·표적단백질분해(TPD) 플랫폼 기반 신약 개발 체제로 체질을 바꾸겠다는 전략이다.
지난 28일 서울 동작구 유한양행 본사에서 열린 R&D 데이에서 만난 김열홍 R&D 총괄 사장과 최영기 중앙연구소장은 항암·비만·면역·대사질환 중심의 차세대 파이프라인 전략과 함께 조직 운영 방식을 바꾸고, 신규 기술 플랫폼도 구축하고 있다고 밝혔다.
◇리스크 분담형·병용요법 개발 확대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공동 투자·공동 개발' 전략이다. 글로벌 제약사·투자사와 공동 투자·공동 개발을 추진하고, 필요하면 별도 법인(NewCo·뉴코)까지 세워 리스크(위험)와 수익을 함께 나누겠다는 것이다.
김열홍 사장은 "최근 글로벌 회사들도 단순히 기술 도입(License-in)하기 보다 별도 회사를 설립해 공동 투자·공동 운영을 하다가 임상 단계가 올라가면 인수하는 방식으로 움직이고 있다"며 "R&D 비용이 커지면서 위험을 분담하고 성공 시 이익을 공유하는 구조가 세계적 흐름이 됐다"고 말했다.
그는 "유한양행의 연간 R&D 투자 규모는 약 2500억원이고 이 가운데 글로벌 혁신 신약 개발에만 약 1500억원이 들어간다"며 "현재 파이프라인을 모두 후기 임상과 3상까지 자체 비용으로 개발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부담이 크다"고 설명했다.
유한양행은 이를 위해 미국 법인인 유한 USA를 중심으로 글로벌 사업개발(BD) 조직을 강화하고 있다고 했다. 김 사장은 "과거 뉴코 설립은 해외 벤처캐피털이나 글로벌 자본 중심이었지만 최근에는 국내 자본도 활발하게 참여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 사장은 미국 바이오기업인 리제네론과 최근 법인 등록지를 스위스로 변경한 나스닥 상장 중국계 기업 비원메디슨(옛 베이진) 사례도 언급했다.
두 회사 모두 항암 치료 병용요법 전략에 필요한 자체 파이프라인(신약 후보 물질)을 동시에 확보하며 글로벌 제약사로 성장한 기업들이다.
김 사장은 "글로벌 회사 수준으로 올라가려면 병용 전략에 필요한 자체 파이프라인을 동시에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며 "그런 라인업을 갖춘 국내 회사는 유한양행밖에 없다고 본다"고 강조했다.
조직 운영 방식도 달라지고 있다. 유한양행은 최근 외부 전문가 중심의 SAB(Scientific Advisory Board·과학자문위원회)를 구축했다. 현재까지 14명의 자문위원을 위촉했으며 홈페이지를 통해 공개하고 있다.
김 사장은 "전문가들의 의견을 총집약해 성공적인 개발을 추진하고 실제 약을 사용할 임상 현장의 피드백까지 반영하려는 목적"이라며 "체계적인 진도 관리와 평가에 기반해 R&D 투자 우선순위를 결정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과거에는 연구원들의 노력과 정성을 고려하다 보니 경쟁력이 떨어지는 과제를 중단하는 데 주저하는 경우가 있었다"며 "이제는 외부 전문가 평가를 기반으로 더 과감하고 객관적인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췄다"고 설명했다.
연구 방향도 변화했다. 기존에는 경쟁 약보다 효능이나 안전성을 개선한 '베스트인 클래스(best-in-class)' 개발이 중심이었다면, 앞으로는 기존에 없던 새로운 작용 원리의 신약인 '퍼스트인 클래스(first-in-class)'와 플랫폼 기술 중심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 "약 안 되던 표적까지 잡는다"…TPD·AI 전략 강화
특히 유한양행은 표적단백질분해(TPD·Targeted Protein Degradation) 기술을 차세대 핵심 축으로 제시했다. TPD는 병을 일으키는 단백질의 기능만 억제하는 기존 약물과 달리, 해당 단백질 자체를 세포 안에서 분해·제거하는 차세대 신약 기술이다. 기존 약물로 공략하기 어려웠던 단백질까지 접근할 수 있어 글로벌 제약업계에서 차세대 플랫폼 기술로 주목받고 있다.
유한양행은 현재 TPD 전담 조직을 꾸렸으며 첫 과제도 제안돼 개발 착수를 준비 중인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기존 PROTAC(프로탁) 방식의 한계를 넘는 차세대 접근법에도 집중하고 있다.
최영기 중앙연구소장은 "초기 TPD는 두 단백질을 연결하는 '바이펑셔널(bifunctional)' 구조의 프로탁 방식이 중심이었다"며 "하지만 분자 크기가 커 약물이 몸 안에 잘 흡수되지 않거나 먹는 약(경구제) 개발이 어렵고, 뇌 등 특정 조직으로 전달하는 데도 한계가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최근에는 작은 분자를 이용해 질병 단백질과 세포 내 분해 시스템을 연결해 표적 단백질을 제거하는 '분자접착 분해제(Molecular Glue Degrader)'가 차세대 기술로 주목받고 있다"며 "과거에는 약으로 만들 수 없다고 여겨졌던 언드러거블(Undruggable) 표적까지 접근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 중"이라고 밝혔다. 그는 "몇 년 안에 의미 있는 성과가 나올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AI 기반 신약 개발 플랫폼 'Yu-NIVUS(유니버스)' 구축도 하고 있다. AI를 활용해 후보물질 설계·합성·활성 예측·최적화까지 연결하는 DMTA(Design-Make-Test-Analyze) 사이클 자동화를 추진하는 것이 핵심이다. 최 소장은 "현재 단계별 기능은 이미 실제 과제에 적용 중"이라며 "내년에는 전 과정을 자동화하는 최적화 시스템까지 구축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유한양행이 이처럼 조직과 전략을 동시에 바꾸는 배경에는 개발·상업화에 성공한 폐암 치료 신약 '렉라자' 이후에 대한 고민이 깔려 있다. 글로벌 상업화 경험을 바탕으로 지속적으로 신약을 만들어내는 글로벌 제약 기업으로 성장하겠다는 전략이다. 김열홍 사장은 "세컨드라인·서드라인 등 작은 시장을 노리는 것이 아니다"라며 "1차 표준 치료 시장으로 올라갈 수 있는 글로벌 블록버스터를 만들겠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