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제약·바이오 기업들이 조직 개편과 흡수합병 등을 통해 사업 구조 재편에 속도를 내고 있다.
신약 개발 비용 부담이 커지는 가운데 자본시장 위축으로 자금 조달 환경이 악화하자, 분산된 연구개발(R&D) 조직과 사업 자산을 본체 중심으로 다시 모으는 움직임이 확산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12일 제약업계에 따르면 한미약품(128940)은 기존 조직을 ▲혁신성장 ▲지속성장 ▲미래성장 ▲성장지원 등 4개 부문 체제로 재편하고, 신제품개발센터·마케팅센터·평택제조센터·해외영업팀 등을 통합 배치했다.
R&D 조직은 미래성장부문 산하로 재정비했다. 회사는 비만대사센터와 항암센터, 융합센터 등을 중심으로 초기 파이프라인 발굴과 임상 전략 기능을 집중하고, 대규모 임상 투자 우선순위를 결정하는 '포트폴리오 위원회'도 운영하기로 했다.
업계에서는 조직 간 의사결정 단계를 줄이고 투자 효율성을 높이려는 조치로 해석하고 있다.
HK이노엔(195940)도 조직 개편 작업을 추진 중으로, 오는 6월 발표할 예정이다. 최근 이 회사는 R&D 총괄 소속 신약연구소를 혁신신약센터, 비임상개발센터, 바이오연구센터, CDMO센터로 개편했다. 기존 바이오연구소를 신약연구소로 두고 조직을 새로 짠 것이다. 바이오연구소 인력을 신약연구소로 통합하면서 R&D 조직 규모가 확대됐다.
콜마그룹 내에서 마이크로바이옴 연구를 담당하던 스코필드바이옴연구소도 HK이노엔 R&D 조직으로 이동했다. 의약품 개발 역량을 그룹 내 전문 제약사인 HK이노엔에 집중하려는 전략으로 해석된다. HK이노엔은 경기도 성남시 판교 제2테크노밸리에 신규 R&D센터를 건설 중이다. 올해 말 준공이 예정돼 있으며 2022년 공시 기준 투자 규모는 1149억원이다.
과거 제약업계가 사업부 분사와 자회사 설립을 통해 연구개발 조직을 세분화하고 기업공개(IPO)를 추진하는 방식으로 몸집을 키웠다면, 최근에는 효율성과 수익성 중심으로 전략 축이 이동하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임상 비용 증가와 제네릭(복제약) 약가 압박이 이어지는 상황에서 제한된 자원을 핵심 파이프라인에 집중하려는 수요가 커졌기 때문이다.
실제 자회사 재통합 움직임이 잇따르고 있다. 휴온스(243070)는 100% 자회사 휴온스생명과학 흡수합병을 추진 중이다. 의약품 사업 조직을 하나로 통합해 생산·연구·영업 기능을 일원화하고, 사업 구조를 단순화하겠다는 전략이다.
회사는 신주를 발행하지 않는 무증자 소규모 합병 방식으로, 오는 6월 23일 합병 기일을 거쳐 6월 중 절차를 마무리할 예정이다. 휴온스는 휴온스생명과학 오송공장을 기반으로 의약품 위탁생산(CMO) 사업 확대도 추진할 계획이다.
일동제약(249420)도 지난달 연구개발 전문 계열사 유노비아를 흡수 합병하기로 했다. 합병 기일은 오는 6월 16일이다.
이는 2023년 유노비아를 물적분할 방식으로 설립한 지 약 2년 만이다. 일동제약은 유노비아 합병을 통해 GLP-1 수용체작용제(GLP-1RA) 계열 비만치료제와 P-CAB 계열 소화궤양 치료제 등 주요 파이프라인 사업화를 본사 중심으로 추진한다는 계획이다. 분산됐던 R&D 자산을 다시 통합해 개발과 사업화 속도를 높이려는 전략으로 풀이된다.
이런 재편 흐름에는 자회사 중복 상장에 대한 시장 경계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과거에는 R&D 조직을 별도 법인으로 분리해 상장시키는 전략이 기업가치 확대 수단으로 활용됐지만, 최근에는 모회사 가치 희석 우려가 커지면서 핵심 자산을 본사에 다시 통합하려는 흐름이 강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HLB(028300)도 그룹 차원의 구조 재편 가능성이 거론되고 있다. HLB는 지난해 자회사 HLB사이언스를 흡수합병 하며 일부 연구개발 기능을 통합했다. 다만 HLB생명과학(067630)과의 합병은 2025년 주식매수청구권 행사 규모가 회사 측 한도를 넘어서면서 철회됐다.
업계에서는 최근 HLB와 HLB생명과학 간 대표이사 재배치 등 조직 개편이 이뤄진 만큼 향후 합병 재추진 가능성도 열려 있다는 시각이 있다. 다만 주식매수청구권 부담을 낮출 수 있는 수준의 주가 흐름이 변수로 꼽힌다.
업계 관계자는 "과거에는 사업부 분사와 자회사 상장이 성장 전략으로 인식됐지만 최근에는 투자 효율성과 기업가치 관리가 더 중요해졌다"며 "핵심 파이프라인과 R&D 역량을 본사 중심으로 재집중하려는 흐름이 당분간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