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대형 제약사(빅파마)들이 '게임체인저'로 개발을 이어온 항암 신약 파이프라인이 잇따라 임상 3상에서 좌초하며 신약 개발의 높은 벽을 다시 드러내고 있다.
먼저 나온 면역항암제와 표적항암제가 생존 지표를 크게 개선한 상황에서 새로운 치료 원리(기전)의 항암 신약 개발의 난도가 높아지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27일 제약바이오업계에 따르면, 미국 머크(MSD)는 지난 21일(현지 시각) 진행성 투명세포 신세포암(ccRCC) 환자 1138명을 대상으로 한 임상 3상(Litespark-012)의 중간 분석 결과를 발표했다.
해당 임상은 기존 표준 요법인 키트루다(성분명 펨브롤리주맙)와 렌비마(성분명 렌바티닙) 병용에 HIF-2α 억제제 '웰리렉(성분명 벨주티판)' 또는 MSD가 개발 중인 항암 신약 후보 물질 '쿼본리맙'을 추가하는 3제 요법의 효과를 평가한 것이다. HIF-2α는 산소 부족 상태에서 암세포 성장을 돕는 단백질이다.
분석 결과, 웰리렉 병용군은 대조군 대비 1차 평가 변수인 무진행생존기간(PFS)과 전체 생존 기간(OS) 모두에서 통계적 유의성을 확보하지 못했다. 쿼본리맙 병용군 역시 동일하게 유효성 입증에 실패했다.
키트루다와 렌비마는 이미 여러 암종에서 강력한 치료 효과를 입증해 표준 치료제로 자리 잡은 병용요법이다. 웰리렉은 일부 적응증에서 허가받은 상태이지만 아직 1차 치료 영역으로 확장은 이뤄지지 않은 단계다. 1차 치료는 질병이 처음 진단됐을 때 가장 먼저 사용하는 표준 치료를 의미한다.
이번 임상은 이를 앞선 치료 단계로 확장하기 위한 시도라 의미가 컸지만, 핵심 시장인 1차 치료 영역에서 생존 혜택을 입증하지 못하면서 적응증 확대 전략에 제동이 걸렸다는 평가다.
미국 빅파마 길리어드 사이언스(Gilead Sciences)와 아커스 바이오사이언스(Arcus Biosciences)는 지난 20일(현지 시각)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 공시를 통해 면역항암제 후보물질 '돔바날리맙(domvanalimab)'의 임상 3상(Star-221)을 종료한다고 밝혔다.
해당 연구는 치료 경험이 없는 전이성 비소세포폐암(NSCLC) 환자를 대상으로 '돔바날리맙+짐베렐리맙+화학요법' 병용요법을 키트루다 기반 치료와 비교하는 설계였다.
그러나 중간 분석 결과, 생존 지표에서 우위를 입증할 가능성이 낮다는 판정이 내려져 종료됐다. 안전성 문제는 없었지만, 효과 부족으로 개발 전략이 사실상 좌초된 것이다. 이와 함께 길리어드는 초기 파이프라인 일부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며 아커스와의 협력 범위도 축소했다.
영국 제약사 아스트라제네카(AstraZeneca)도 후기 임상에서 비슷한 어려움을 겪었다. 지난해 12월 폐암 환자를 대상으로 한 임상 3상에서 면역항암제 '임핀지(Imfinzi)'와 ATR 저해제 후보물질 세랄라서팁(ceralasertib) 병용요법의 치료 효과 입증에 도전했으나, 전체생존기간(OS) 개선에 실패했다.
ATR 저해제는 암세포의 DNA 손상 복구(DNA damage response) 기능을 차단하는 원리다. 면역항암제 임핀지와 병용해 항암 치료 효과를 높이려는 게 이 회사의 전략이었는데, 임상 3상에서 제동이 걸린 것이다.
이들 사례는 차세대 항암제 개발 후기 임상 단계의 높은 난도를 여실히 보여준다. 업계 관계자는 "초기 임상에서 반응률이 높아도 대규모 3상에서는 환자군 이질성과 기존 치료 효과 때문에 결과가 희석되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특히 이미 출시된 약제를 병용하는 현재의 표준 치료가 암 환자의 생존 효과를 크게 키운 상황에서 새로운 치료 전략이 압도적인 데이터를 내는 데 난항을 겪고 있음을 보여준다.
암세포는 T세포(면역세포)가 자신을 공격하지 못하도록 '브레이크 신호'를 보내는데, 그 역할을 하는 게 PD-1 경로다. 블록버스터 면역항암제 키트루다, 옵디보 등 PD-1 억제제는 이 브레이크 신호를 차단해, 암세포의 방해 없이 T세포가 다시 정상적으로 암을 공격할 수 있도록 만드는 원리다.
길리어드와 아커스가 개발해 온 돔바날리맙은 TIGIT이라는 또 다른 면역 억제 수용체를 차단하는 원리다. 즉, PD-1 억제제 이후에도 남아 있는 추가적인 면역 억제 신호를 해제해 항암 효과를 높이려는 접근 전략이다.
의약계에선 TIGIT 억제 전략에 기대를 모았지만, 실패 사례가 잇따르고 있다. 앞서 스위스 제약기업 로슈(Roche), 영국 글락소스미스클라인(GSK) 등이 TIGIT 계열 항암제 개발에 먼저 도전했으나, 로슈는 임상 3상 단계에서 주요 지표 달성하지 못했고, GSK는 임상 3상에 성공했다는 평가가 나왔지만, 애초 기대 대비 유효성이 제한적이라는 판단이 나오면서 상업화에 도달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항암제 시장을 향한 도전은 이어질 전망이다. 의약품 시장조사기관 아이큐비아(IQVIA)에 따르면 글로벌 항암제 시장은 2024년 약 2520억달러(약 373조원)에서 2029년 약 4410억달러(약 653조원) 규모로 커질 전망이다. 연평균 11~13% 수준의 두 자릿수 성장세가 이어질 것으로 분석됐다.
인구 고령화로 암 환자가 증가하고 있는 데다 조기 진단 기술 발전으로 치료 기간이 연장되고 있는 추세다. 빅파마와 바이오 기술 회사들은 새로운 원리의 항암제, 기존 치료제 간 시너지를 겨냥한 다양한 연구·개발(R&D)에 투자를 지속 확대하고 있다. 개발 성공 시 파급력이 큰 만큼 차세대 항암제 개발 경쟁은 이어질 것이라는 게 업계 관계자들의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