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클리블랜드 클리닉 중앙홀의 투명 유리 상자 안에 설치된 IBM 퀀텀 시스템 원(IBM Quantum System One) 양자컴퓨터. Q4Bio 200만 달러 상금의 수상팀은 이 양자컴퓨터로 광감응 항암제의 작용 과정을 시뮬레이션했다./IBM

환자 몸에 빛을 쪼이면 항암제가 암세포만 골라 파괴한다. 마치 전폭기가 폭탄을 투하하고 레이저로 목표물을 지정하는 것과 같다. 미국의 웰컴 리프(Wellcome Leap)는 "핀란드의 양자 소프트웨어 기업인 알고리드믹(Algorithmog)과 미국 IBM, 클리블랜드 클리닉 공동 연구진이 퀀텀포바이오(Q4Bio) 대회에서 광감응성 항암제 개발 연구로 최종 우승했다"고 지난 16일(현지 시각) 밝혔다.

웰컴 리프는 영국의 웰컴 트러스트가 미국 샌디에이고에 설립한 비영리 연구재단이다. 2023년 시작된 퀀텀포바이오는 생명과학과 의학 연구에 양자컴퓨터를 활용하는 연구 대회로, 향후 3~5년 내 등장할 상용 양자컴퓨터에서 실행 가능한 바이오 연구용 양자 알고리즘을 개발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알고리즘은 하드웨어인 컴퓨터가 문제를 해결하는 절차나 방법을 말한다. 이를 코드로 구현한 프로그램이 소프트웨어이다.

◇빛 받아 암세포 죽이는 과정 시뮬레이션

알고리드믹 컨소시엄 연구진은 IBM의 양자컴퓨터를 이용해 광감응성 항암제의 핵심 작용 과정을 시뮬레이션(모의 실험)했다. 원리는 이렇다. 빛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항암제를 인체에 주입해 암세포를 찾아가도록 한다. 이후 밖에서 환부에 레이저를 쏘면 항암제가 활성 산소를 만들어 암세포만 골라 죽인다. 연구진은 약물 분자 하나가 빛 입자인 광자와 상호작용하는 과정을 시뮬레이션했다.

물론 모든 과정을 양자컴퓨터로 한 것은 아니다. 아직 그 정도 능력을 갖춘 양자컴퓨터가 없기 때문이다. 일부 시뮬레이션은 기존 컴퓨터로 했다. 사브리나 마니스칼코(Sabrina Maniscalco) 알고리드믹 대표는 "앞으로 더 강력한 양자 시스템에서 같은 알고리즘을 실행하면 고전적 시뮬레이션으로는 불가능한 분자 정보를 도출할 수 있음을 입증했다"며 "이 알고리즘은 새로운 항균제 설계와 같은 다른 분자 문제에도 적용될 수 있다"고 말했다.

양자컴퓨터와 인공지능(AI)은 신약 개발의 패러다임을 바꿀 기술로 부상했다. 신약 하나를 개발하려면 10년 이상, 수조 원이 들지만 성공률은 10%도 안 된다. 생물학연구정보센터(BRIC) 최신 보고서에 따르면 AI는 이미 신약 개발 기간을 평균 40~60% 단축하고 비용을 최대 70%까지 절감했다. 약물이 인체와 반응하는 모든 경로를 컴퓨터로 시뮬레이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양자컴퓨터는 현재 AI보다 신약 개발 속도를 획기적으로 높일 수 있다. 한남식 연세대 양자정보학과 교수는 "기존 AI는 한 번에 하나의 경로만 탐색하지만, 양자 알고리즘은 양자 특성 덕분에 '손오공의 분신술'처럼 여러 경로를 동시에 시뮬레이션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구글 연구진은 2019년 10월 국제 학술지 '네이처'에 현존 최고의 슈퍼컴퓨터로 1만년 걸릴 난수 증명 문제를 양자컴퓨터로 200초 만에 해결했다고 발표했다. 당시 연구진은 큐비트 53개를 갖춘 시카모어 칩을 사용했다./구글

◇1만 년 걸릴 문제 200초 만에 해결

양자컴퓨터는 흔히 슈퍼컴퓨터보다 1000만배 빠른 계산이 가능한 '꿈의 컴퓨터'로 불린다. 현재 AI를 쓰는 컴퓨터는 전자가 없거나 있는 것을 0과 1, 즉 비트(bit) 단위로 표현한다. 반면 양자컴퓨터의 단위는 0과 1 상태가 중첩된 큐비트이다. 일반 컴퓨터가 2비트이면 00, 01, 10, 11 네 가지 중 하나가 되지만, 2큐비트는 네 가지가 동시에 다 가능하다. 만약 큐비트가 300개라면 우주의 모든 원자 수보다 많은 2의 300제곱 상태가 가능해 컴퓨터 연산 능력이 획기적으로 커진다.

지난해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존 마티니스 UC샌타바버라 교수가 이끈 구글 양자 AI 연구진은 2019년 10월 국제 학술지 '네이처'에 현존 최고의 슈퍼컴퓨터로 1만년 걸릴 난수 증명 문제를 양자컴퓨터로 200초 만에 해결했다고 발표했다. 양자컴퓨터가 슈퍼컴퓨터를 능가하는 이른바 '양자 우위'가 처음으로 달성된 순간이었다. 당시 연구진은 큐비트 53개를 갖춘 시카모어(Sycamore) 양자 칩을 사용했다.

알고리드믹 연구진은 이르면 3년 안에 상용화될 수준의 양자컴퓨터를 감안해 알고리즘을 개발했다. 대회 주최 측은 200만달러(29억원) 상금 수상 기준으로 큐비트 50개 이상으로 연산 단계가 1000~1만개인 회로 깊이를 제시했다. 양자 상태를 구현하는 원리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밀리초(1000분의 1초)에서 수초 만에 계산이 가능한 수준이다.

현재 개발된 양자컴퓨터는 작동 원리가 각각 다르다. 가장 대표적인 양자컴퓨터 방식은 초전도 회로와 이온 트랩(덫)이다. 구글이나 IBM은 극저온에서 전기 저항이 사라지는 초전도 상태에서 큐비트를 구현했다. 이번 대회에서 결선에 진출한 6개 팀 중 알고리드믹 등 5개 팀이 IBM의 양자컴퓨터를 사용했다.

이온 트랩(덫)은 양전하나 음전하를 띠는 원자인 이온을 두 상태가 중첩된 상태로 가두는 방식으로 큐비트를 표현한다. 미국 듀크대 김정상 교수가 창업한 아이온큐(IonQ)는 지난해 6월 큐비트 36개를 갖춘 이온 트랩 양자컴퓨터로 아미노산 사슬들이 접히면서 단백질의 3차원 구조를 만드는 과정을 시뮬레이션했다.

D형 간염 바이러스. 염기 1700여개로 구성된 바이러스의 유전 정보가 처음으로 양자컴퓨터에 탑재됐다./Science Source

◇게놈 유전자 해독에도 활용 기대

AI는 이미 2017년을 기점으로 신약 개발에 본격적으로 활용됐다. 미국의 AI 컨설팅 업체인 인튜이션랩에 따르면 임상 개발 단계에 있는 AI 신약 프로그램은 173개 이상에 달하고, 올해에만 15~20개 프로그램이 임상 3상 시험에 진입할 것으로 예상된다. 양자컴퓨터가 발전하면 AI의 신약 개발 속도가 더 빨라질 수 있다. 특히 환자 고유의 유전자 정보에 기반한 맞춤형 치료제를 개발할 수 있다.

인간의 유전 정보가 담긴 게놈(유전체)은 약 32억개의 염기쌍으로 구성된다. 생명체는 염기들이 배열된 순서에 따라 아미노산들을 연결해 모든 생명 현상을 관장하는 단백질을 만든다. 인간의 염기 정보를 디지털 정보로 환산하면 64억 비트 또는 750메가바이트가 된다. 이 정도면 큐비트 33개만으로 모두 저장할 수 있다. 인류의 모든 유전 정보를 저장하는 데에도 큐비트 100개 미만으로 가능하다.

영국 웰컴 생어 연구소와 옥스퍼드대 연구진은 지난 9일 D형 간염 바이러스의 유전 정보가 모두 담긴 게놈 정보를 양자컴퓨터에 탑재하는 데 세계 최초로 성공했다고 밝혔다. 이들도 이 연구로 퀀텀포바이오 대회에서 결선에 진출했다. 연구진은 이번에 D형 간염 바이러스의 게놈을 이루는 염기 1700여 개의 정보를 IBM의 양자컴퓨터에 탑재했다. 특정 생물 유전체 전체를 양자컴퓨터가 처리할 수 있는 형식으로 변환한 것이다.

다만 상용화까지는 과제가 남아 있다. 양자컴퓨터의 오류 문제를 해결해야 생명과 직결되는 유전체 분석에 쓸 수 있다. 고도로 최적화된 기존 컴퓨팅 알고리즘과의 효율성 경쟁도 넘어야 할 산이다. 이번 퀀텀포바이오 대회는 의학과 생명과학 난제를 해결하는 데 양자컴퓨터가 효과가 있음을 시뮬레이션으로 입증했다. 바이오의 양자 시대가 성큼 다가왔다.

참고 자료

Q4Bio(2026), https://wellcomeleap.org/q4bio_prize_announcement/

Wellcome Sanger Institute(2026), https://www.sanger.ac.uk/news_item/genome-loaded-onto-a-quantum-computer-in-world-first/

arXiv(2025), DOI: https://doi.org/10.48550/arXiv.2506.07866

Nature(2019), DOI: https://doi.org/10.1038/s41586-019-166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