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으로 한정됐던 사람유두종바이러스(HPV) 국가예방접종 지원 대상이 남아로 확대되면서 정책을 둘러싼 논쟁이 이어지고 있다. 한정된 재정에서 남성까지 포함할 필요가 있느냐는 지적과, 감염 특성과 예방 효과를 고려하면 불가피한 조치라는 의견이 맞서는 상황이다.
18일 질병관리청에 따르면 기존 12세~26세 여성 대상이던 HPV 백신 국가예방접종 지원사업은 내달 6일부터 12세 남아(2014년생)까지 확대된다.
이를 위해 관련 예산은 지난해 210억원에서 올해 303억원으로 약 93억원 늘었다. 독감과 HPV 등을 포함한 국가예방접종 전체 예산도 3567억원에서 4371억원으로 증가했다.
◇"남녀 80% 접종해야 HPV 퇴치…집단면역이 관건"
논쟁의 초점은 '우선순위'에 맞춰져 있다. 한정된 재원으로 더 시급한 백신을 우선 지원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지만, 전문가들은 HPV 특성상 남성까지 접종을 확대하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본다.
HPV는 감염 자체가 매우 흔한 바이러스다.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에 따르면 거의 모든 사람이 평생 한 번 이상 HPV에 감염되며, 여성 자궁경부암의 90%, 남성의 음경암·인두암·구강암·항문암의 약 70%가 HPV와 관련돼 있다.
감염자의 상당수는 2년 내 자연 소멸되지만, 약 10%에서는 감염이 지속되며 암으로 이어질 수 있다. 국제인유두종협회(IPVS)는 전 세계 암의 5.2%가 HPV가 원인이라고 보고 있으며, 연간 60만~80만 명의 환자가 발생한다.
특히 남성은 면역 반응 측면에서 더 취약하다. IPVS 자료에 따르면 HPV 감염 시 항체 형성 비율은 여성 70~80% 수준인 반면, 남성은 20~30%에 그친다. 2020년 기준 국내 두경부암 약 6400건 중 4800건이 남성에서 발생했다.
현재 남녀 간 접종 격차도 뚜렷하다. 지난해 기준 12~17세 여성 청소년의 HPV 1회 이상 접종률은 87.6%에 달했지만, 남성 청소년은 1%에도 못 미쳤다.
전문가들은 HPV 예방을 개인이 아닌 '집단 면역'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실제로 OECD 38개국 중 36개국이 남녀 모두에게 HPV 백신 접종을 권고하고 있으며, 남녀 각각 약 80%의 접종률이 확보돼야 HPV 퇴치가 가능하다는 분석이 나온다.
HPV 백신은 다른 백신과 달리 효과를 즉각 확인하기 어렵다는 점도 논쟁의 배경이다. 다만 HPV 관련 암은 원인 바이러스와의 연관성이 명확히 규명된 만큼, 예방 효과에 대한 의학적 근거는 충분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다.
이세영 중앙대병원 이비인후과 교수(대한두경부외과학회 의무이사)는 "코로나나 독감 백신은 접종 후 단기간 내 효과를 확인할 수 있지만, HPV는 감염은 청년기에 이뤄지고 암 발현까지 10~30년이 걸려 즉각적인 예방 효과 확인이 어렵다"며 "이 때문에 예방 효과를 둘러싼 논쟁이 반복된다"고 설명했다.
◇OECD 29개국은 '9가' 맞는데, 韓은 '4가'
어떤 백신을 국가예방접종에 포함하느냐를 둘러싼 논쟁도 뜨겁다.
현재 전 세계에 유통되는 HPV 백신은 영국 글락소스미스클라인(GSK)의 '서바릭스(2가)', 미국 머크(MSD)의 '가다실(4가)'과 '가다실9(9가)'가 유일하다. 이 가운데 정부가 무료로 지원하는 백신은 2가 서바릭스와 4가 가다실이다.
HPV 백신은 예방 가능한 바이러스 유형에 따라 2가·4가·9가로 나뉜다. 2가는 자궁경부암의 약 70%를 유발하는 16·18형을, 4가는 여기에 더해 생식기 사마귀의 90% 이상을 유발하는 6·11형을 포함한다. 9가는 기존 4가에 고위험군 바이러스 5종(31·33·45·52·58형)을 추가로 차단해, 현재 가장 넓은 범위를 예방한다.
국제적으로는 9가 백신이 표준으로 자리 잡는 추세다. OECD 38개국 중 미국·영국·캐나다·호주 등 29개국이 이미 남녀 모두에게 9가 백신을 지원하고 있으며, 미국에서는 2가·4가 백신 사용이 사실상 중단됐다.
반면 한국을 비롯해 네덜란드, 코스타리카, 콜롬비아 등 일부 국가는 여전히 2가 또는 4가 백신을 지원하고 있다.
이 때문에 가장 넓은 예방 범위를 가진 9가 백신 '가다실9'이 국가예방접종에서 제외된 점을 두고 아쉬움을 제기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실제 접종 현장에서도 9가 백신 수요는 압도적이다. 의약품 시장조사기관 아이큐비아에 따르면 지난 2023년 가다실9 매출은 1170억원으로 국내 의약품 판매 순위 3위에 올랐다. 가다실4의 매출은 300억원대였다.
민경진 고대안산병원 산부인과 교수는 "아시아에서 흔한 HPV 52형과 58형은 9가로만 예방할 수 있다"며 "전 세계 자궁경부암의 약 90%가 9가지 HPV 유형에 의해 발생하는 만큼, 국내에서도 최대 예방 효과를 위해 남녀 모두에게 9가 백신을 국가예방접종에 포함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4가→9가 전환 시 165억원 더 필요"…재정 한계에 '속도 조절'
정부가 4가 백신을 유지한 배경에는 비용 부담이 자리하고 있다.
질병관리청은 지난해 김남희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국정감사 질의에 대한 서면 답변에서 "국가예방접종을 전면 9가로 전환할 경우 접종률에 따라 약 90억~165억원의 추가 예산이 필요하다"며 "필요성에는 공감하지만 예산 문제로 즉각 전환은 어렵다"고 밝혔다.
실제 비용 차이도 적지 않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가다실9'의 전국 평균 접종 비용은 21만9032원으로, 의료기관별로 16만~30만원 수준이다. 3회 접종을 모두 마칠 경우 개인 부담은 약 18만~60만원에 달한다.
반면 4가 백신은 1회 접종당 약 6만~7만원, 9가는 11만~13만원 수준으로 단가 차이가 크다. 국가예방접종 대상이 연간 약 25만 명임을 고려하면, 단가 인상분만으로도 연간 100억원 이상의 추가 재정이 필요하다.
제조사 MSD가 공급가를 꾸준히 인상해온 점도 부담 요인이다. '가다실9'은 2021년 4월 15%, 2022년 6월 8.9% 등 2년 연속 가격을 올렸다.
이혜림 질병청 예방접종관리과장은 "9가 백신 전환을 위해 재정 당국과 협의를 이어가고 있다"면서도 "한정된 재원 내에서 남성 청소년까지 지원 대상을 확대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판단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