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수 시장과 기술 수출 중심으로 성장해 온 국내 제약·바이오 기업들이 글로벌 신약 개발에 도전하고 있다. 후보물질 발굴과 라이선스 아웃(License-out, 기술 이전)을 넘어 글로벌 임상, 상업화까지 전 과정을 직접 수행하는 '풀 밸류체인' 구축을 노리며 판을 키우고 있는 것이다. 글로벌 신약 개발에 승부를 건 기업들의 개발 전략과 가능성을 조명해 본다. [편집자주]

정재준 아리바이오 대표이사는 3월 24일 경기도 성남시 분당 판교 사무실에서 조선비즈와 만나 "한국도 우리의 신약을 가져야 한다는 사명감을 갖고 치매 치료제 개발 완주에 도전한 것"이라며 "한국 기업들이 기술 수출(License-out, L/O)에 머물지 않고 신약 개발 전 과정을 완주해야 비로소 한국이 '신약 주권', '제약 주권'을 가질 수 있다"고 말했다./조선비즈

기억을 잃는 병 '알츠하이머 치매'는 난공불락의 질병이다. 2021년 일본 에자이와 미국 바이오젠이 공동 개발한 '아두헬름'이 세계 최초의 알츠하이머병 진행 억제 치료제로 미국 식품의약국(FDA) 허가를 받았으나 효능 논란을 겪다 시장에서 퇴출당했다.

이후 에자이·바이오젠이 개발에 성공한 '레켐비'(2023년 승인), 미국 일라이 릴리가 개발한 '키순라'(2024년 승인)가 알츠하이머 치매 치료 시장을 양분하고 있다. 하지만 치료 원리와 부작용 등 특성상 이들 치료제를 쓸 수 있는 환자는 매우 제한적이다.

이런 미개척 분야에 한국 기업 아리바이오가 도전 중이다. 2010년 설립된 이 회사는 기존 알츠하이머병 치료제와 작용 원리(기전)가 다른 AR1001로 개발·허가까지 완주하는 승부수를 걸었다.

지난 24일 경기도 성남 판교에서 조선비즈와 만난 정재준 아리바이오 대표는 "항암제나 비만치료제 개발은 이미 운동장이 기울어져 있지만, 알츠하이머는 거대 글로벌 제약 기업도 정복하지 못한 분야라 운동장이 평평해 보였다"며 "그래서 한번 해볼 만하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정 대표는 영국 글래스고 대학교(University of Glasgow)에서 생리 생화학 이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과학자 겸 경영자로, 재영한국과학기술자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 "AR1001, 복합 작용으로 인지 기능 저하 늦추는 원리"

다들 정 대표를 향해 '하필 왜 알츠하이머병이냐', '왜 다른 치료 원리(기전)를 택하느냐'라고 반문했지만, 그의 역발상은 신약 개발 가능성을 키운 출발이 됐다.

AR1001은 원래 SK케미칼이 발기부전 치료제로 개발하려 한 PDE5 저해제(억제제) 계열 화합물이었다.

당시 SK케미칼과 연구개발(R&D) 협업해 온 정 대표가 한 미국 학자로부터 PDE5 저해제가 인지 기능 개선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가설을 접하면서 이 물질의 운명도 바뀌었다. PDE5는 혈관을 이완시키는 신호 물질을 분해하는 효소로, 이를 억제하면 혈관이 확장돼 혈류가 개선되는 원리다.

치매 치료제 개발 가능성을 가늠하고자 시행한 동물실험에서 AR1001의 효능을 확인한 정 대표는 2011년 이 물질을 도입하고 본격적으로 개발을 추진했다.

정 대표는 AR1001에 대해 "PDE5 저해제와 계열은 같지만, 뇌세포를 직접 보호하고 독성 단백질을 배출하는 데 최적화하고자 새롭게 설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실험 데이터상 AR1001은 뇌 안에서의 인지 기능 개선과 뇌 혈류 확장 효능이 다른 계열의 PDE5 억제제보다 10배 이상 강력하다"고 말했다.

그래픽=손민균

시중에 나온 레켐비와 키순라는 알츠하이머 치매의 유발 요인 중 하나인 '아밀로이드 베타'만을 겨냥해 나온 주사제다.

AR1001은 접근법이 다르다. 여러 원인 경로를 동시에 접근하는 '다중 기전(Multi-target)'으로, 하루 한 알 복용하는 경구용 치료제로 개발되고 있다. 혈관을 확장하는 PDE5 억제 작용을 통해 뇌 혈류를 개선하고, 신경세포 사멸을 억제하며, 독성 단백질 제거까지 유도하는 치료 원리다. 치매의 발병 요인이 복합적이기 때문에 단일 타깃이 아닌 다각도의 공략이 필요하다는 시각이 깔려있다.

개발 초창기부터 아리바이오를 향한 시장의 의구심이 이어졌지만 AR1001은 이미 큰 진전을 이뤘다. 신약 허가 전 마지막 임상 절차인 글로벌 임상시험 3상 막바지 개발 단계에 와 있기 때문이다. 국내 기업 중에서 치매 신약 개발로 임상 3상까지 직접 진행한 건 아리바이오가 유일하다.

정 대표는 "미국, 한국을 포함한 13개국에서 환자 약 1500명을 대상으로 진행 중인 글로벌 임상 3상의 성과 발표가 가시권에 있다"며 "오는 6월 말 마지막 환자의 12개월 투약이 종료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후 데이터 정리와 통계 분석 작업을 거쳐 9월 말 전후로 주요 지표(탑라인) 데이터가 발표될 것으로 예상된다.

3월 17일(현지 시각)부터 21일까지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열린 'ADPD 2026'에서 글로벌 임상 책임 연구자인 미국 스탠퍼드대 치매센터장 샤론 샤(Sharon Sha) 교수가 AR1001의 글로벌 임상 3상 진행 상황을 발표하고 있다. /아리바이오

정 대표는 한국 기업들의 글로벌 임상 3상 완주 도전이 늘어야 한국이 비로소 '신약 주권'을 확보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기업이 자국민 치료에 필요한 의약품을 외부 의존 없이 개발·생산·공급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춰야 글로벌 시장 경쟁과 보건 안보 측면에서 국가적 헤게모니와 권리를 확보할 수 있다는 개념이다.

그는 "기술 수출은 초기에 리스크(위험)를 없애는 데는 굉장히 좋은 방법이지만 글로벌 제약사에 기술을 이전하는 순간부터 우리는 아무 것도 통제할 수 없게 된다"고 지적했다.

정 대표는 "현재 세계 치매 신약 R&D의 주도권을 일본이 쥐고 있는데 그 이유는 에자이의 도전 덕분"이라고 말했다. 그는 "에자이의 아두헬름 상업화 실패는 곧이어 레켐비 개발 성공의 중요한 거름이 됐다"며 "이처럼 신약 개발은 실패를 통해 배우는 산업이고, 긴 임상 릴레이의 경험 자체가 국가와 산업에 큰 자산이 된다"고 강조했다.

정 대표는 "AR1001 개발 여정에서 글로벌 대형 기업들의 다양한 제안도 있었다"며 "하지만 한국 기업의 개발 도전이 갖는 의미와 약물이 지닌 가치를 믿고 끝까지 가보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 소룩스의 차백신연구소 인수 큰 그림은?

최근 아리바이오의 최대주주 소룩스(290690)가 차바이오그룹 산하 차백신연구소(261780)의 경영권 인수를 발표해, 그 배경을 두고 시장의 관심도 커지고 있다.

LED 조명기업인 소룩스는 2023년 약 300억원을 투입해 아리바이오 지분을 확보하며 최대주주에 올랐다. 이후 현재 아리바이오와의 합병을 추진 중이다.

이런 가운데 소룩스는 차바이오그룹 산하 차백신연구소의 지분 14.7%를 153억4000만원에 인수한다고 지난 19일 공시했다. 소룩스는 "경영권 인수를 통해 신사업에 진출하고, 수익성 개선을 통해 재무 건전성을 확보하기 위한 결정"이라고 밝혔다.

이에 대해 정 대표는 "소룩스의 차백신연구소 경영권 인수 발표는 아리바이오의 중장기 치매 치료제 개발 전략과도 맞닿아 있다"고 말했다.

특히 그는 "미래의 알츠하이머 치료는 '염증'과 '면역'이 화두가 될 것"이라며 "차백신연구소가 보유한 독자적인 면역 증강 플랫폼(L-pampo) 기술을 활용한 접근이 우리의 치매 치료제 개발 전략 중 하나가 될 수 있다"고 밝혔다. 실제 최근 국제 학계에서 백신의 면역 증강 기술이 뇌 내 염증을 없애고 면역을 높이는 데 탁월한 기반 기술로 주목받고 있다.

수두 대상포진 바이러스(Varicella-Zoster Virus)는 신경절에 잠복하고 있다가 인체 면역력이 떨어질 때 활동을 재개해 엄청난 통증을 유발한다. 최근 국제 학계에선 대상포진 백신이 치매까지 예방할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잇따라 나왔다. 수십만 명을 대상으로 장기간 추적 관찰한 연구에서 백신이 대상포진은 물론 치매를 20% 줄이는 효과가 나타났다./Getty Images

이날 정 대표는 "제 어머니도 루이소체 치매로 투병하다 최근 세상을 떠났다"고 밝혔다. 그는 "치매는 아픈 병이 아니라 슬픈 병이라고 불린다. 환자 가족이 겪는 슬픔과 고통도 이루 말할 수 없다"고 말했다.

아리바이오의 사명 '아리'는 아픔을 이해하고 치유를 실현하며 희망을 만든다는 뜻의 우리말이다. 정 대표는 "평창 동계올림픽 구호 '아리아리'처럼, 길이 막히면 돌아가고 길이 없으면 찾아가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며 "K-바이오가 글로벌 무대에서 과소평가 받지 않게 하는 것, 결과물로 그것을 증명하는 것이 저의 소명"이라고 말했다.

정 대표가 그리는 치매 치료 비전은 한발 더 나아가 있다. 그는 "치매 증상이 나타나기 15~20년 전부터 뇌세포 파괴가 시작된다"며 "55세에서 60세 사이, 즉 퇴직을 앞둔 시점에 먹는 약 또는 백신으로 치매를 원천 차단할 수 있는 예방 치료 시장을 개척하는 것이 아리바이오가 그리는 미래이자 궁극적 목표"라고 밝혔다.

참고 자료

Lancet Neurology(2026), DOI: https://doi.org/10.1016/S1474-4422(25)00455-7

Cell(2025), DOI: https://doi.org/10.1016/j.cell.2025.11.007

Nature Medicine(2024), DOI: https://doi.org/10.1038/s41591-024-03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