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약품(128940)그룹 지주회사 한미사이언스 이사회가 한미약품 대표이사 연임 대신 교체를 택했다.
고(故) 임성기 창업주의 배우자 송영숙 회장, 딸 임주현 부회장이 지지해 온 전문경영인 박재현 대표이사가 물러나고, 황상연 HB인베스트먼트 프라이빗에쿼티(PE) 부문 대표가 새로운 전문경영인 대표로 내정됐다.
한미사이언스(008930)는 12일 오후 이사회를 열고 황상연 대표를 비롯한 한미약품 신규 이사 선임 안건을 한미약품 정기 주주총회 주요 안건으로 상정했다.
조선비즈 취재 결과, 4자 연합 내부 논의 과정에서 한미사이언스 개인 최대 주주인 신동국 한양정밀 회장이 한미약품 대표이사 교체 뜻을 고수했다. 황상연 한미약품 대표 내정자는 증권업계 출신인 신 회장 측 인사가 제안했다고 한다.
신 회장 측근은 황 대표에 대해 "신 회장과 개인적으로 친분이나 인연은 없다"고 말했다. 다른 신 회장 측 관계자는 이번 대표 교체에 대해선 "과거의 계파 갈등을 매듭짓고 기존 인물 대신 제3의 전문가를 앞세운 인적 교체"라고 피력했다.
그러나 법조계와 투자업계의 시각은 다르다.
'신 회장과 창업자 일가 모녀의 갈등', '지난달 신 회장의 약 2000억원 규모 자금 차입을 통한 한미사이언스 지분 확대'에 이어 나온 PE 출신 대표 선임 카드이기 때문이다. 신 회장이 향후 지분 거래를 통한 투자금 회수(엑시트) 등 다양한 선택지를 염두에 둔 포석일 수 있다는 해석이 나왔다.
◇"모녀 vs 신동국 한발씩 물러난 것"
이번 이사회의 결정으로 한미약품 이사회가 바뀔 예정이다.
오는 31일 열리는 한미약품 주총을 통해 ▲황상연 HB인베스트먼트 프라이빗에쿼티(PE) 부문 대표, ▲김나영 한미약품 신제품개발본부장, ▲채이배 전 국회의원, ▲한태준 겐트대 글로벌캠퍼스 총장이 신규 이사로 선임될 예정이다.
기존 이사회 10명 중 전문경영인 박재현 대표를 비롯한 4명이 교체되는 것이다.
한미사이언스 이사회도 변화가 있다. 이사진 10명 중 1명이 나오고 김남규 라데팡스 대표가 한미사이언스 주총을 거쳐 한미사이언스 기타 비상무이사로 선임될 예정이다. 김남규 대표는 신 회장이 유리한 구도인 한미사이언스 이사회에 대한 견제를 할 수 있는 인물로 평가된다. 앞서 라데팡스는 신 회장, 모녀(송영숙 회장, 임주현 부회장)와 함께 4자 연합을 이루고, 경영권 방어를 위해 의결권 공동 행사 등을 약정하는 주주 간 계약을 맺었다.
한미그룹 이사회 내부 사정에 밝은 한 인사는 "신동국 회장은 이번 이사회와 주총을 통해 한미약품 대표 교체와 이사회 장악이 목표였고, 모녀 송 회장과 임 부회장은 박재현 대표의 연임과 한미약품 이사회 사수가 목표였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새 이사회 구성을 보면, 양측이 목표의 절반만 이룬 격"이라며 "대표 이사 교체는 신 회장이 원했던 방향이나, 신규 이사진을 비롯한 이사회 구성은 신 회장에게 유리한 구도는 아니다"라고 분석했다.
황 대표 내정자 선임이 최종 확정되면 한미약품은 53년만의 첫 외부 영입 인사 대표 체제가 된다.
그동안 한미약품을 이끈 전현직 대표(이관순, 우종수, 권세창, 박재현)는 창업주 고(故) 임성기 회장의 경영 철학을 공유하며 수십 년간 한미약품의 성장을 이끈 내부 승진 전문경영인이었다.
박재현 대표의 연임이 불발되면서, 회사 내부에선 우려와 불안도 커지고 있다. 박 대표는 신 회장의 한미약품 경영 간섭과 특정 임원의 성비위 처분 절차 개입 등을 공개적으로 문제 제기했다.
한미그룹 한 직원은 "결국 신 회장 뜻대로 박 대표 연임이 저지된 것이라, 앞으로 신 회장이 새 대표를 통해 직간접적 경영 개입을 할 것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그는 "벌써 직원들 사이에서 의약품 원가 절감과 연구개발(R&D) 축소뿐 아니라 계열사를 매각 정리할 수 있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고 했다.
◇대주주 신동국 회장 투자금 회수 시나리오?
이번 한미약품 이사회 재편 배경에는 신동국 회장과 창업자 일가 모녀 간의 갈등이 깔려 있다.
한미약품 창업자 일가의 경영권 분쟁 당시 모녀와 신 회장, 라데팡스는 '4자 연합'을 이뤄 형제와 대결에서 이겼다. 4자 연합은 경영권 방어를 위해 의결권 공동 행사 등을 약정하는 주주 간 계약을 맺었다.
하지만 신 회장이 작년 한미약품 지분을 담보로 교환사채(EB)를 발행하면서 계약 위반 여부를 둘러싼 다툼이 이어졌다. 모녀 측은 사실상 지분 처분과 다름없다며 소송을 제기하고 신 회장 자택과 지분 일부를 가압류한 상태다.
이날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선 모녀 측이 신 회장을 상대로 청구한 소송의 첫 변론도 열렸다. 앞서 신 회장은 지난 2월 한미사이언스 지분 6.45%를 2173억원에 추가 매입하며 개인과 한양정밀 지분을 합쳐 약 30% 수준까지 끌어올렸다. 이 과정에서 약 2000억원 규모의 외부 자금도 차입했다.
이런 상황에서 등장한 황상연 대표 카드를 두고 업계에선 여러 해석이 나오고 있다. 황 대표는 미래에셋증권 리서치센터장, 알리안츠글로벌인베스터스 최고투자책임자(CIO), 종근당홀딩스 대표 등을 지낸 금융·투자 전문가다. 현재는 HB인베스트먼트에서 사모펀드 투자 업무를 맡고 있다.
투자은행(IB)업계 관계자는 "PE 출신 경영인이 기업 대표로 선임될 경우 기업가치 제고와 지배구조 정비, 투자 등 재무적 전략에 무게가 실리는 경우가 많다"며 "신 회장 측이 모녀에게 등을 돌리고 장기적으로 전략적 투자자 유치나 지분 거래 같은 엑시트 시나리오를 염두에 둔 새 판을 짜고 있는 것이란 해석이 많다"고 말했다.
다만 신 회장은 "4자연합 내부 갈등과 경영권 분쟁과는 무관하다"며 확대 해석을 경계했다. 그는 전문경영인 체제를 존중하겠다는 입장도 밝힌 바 있다.
이에 대해 업계 관계자는 "경영권 분쟁이 표면화하면 신 회장이 원하는 지분 거래 희망 가격을 비롯한 엑시트 전략에도 차질이 생기기 때문"이라고 해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