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랍에미리트(UAE) 두바이에서 매년 열리는 중동 최대 규모 의료기기 전시회 '아랍헬스' 전경. /조선비즈DB

이란의 호르무즈 해협 봉쇄 장기화 가능성에 국내 제약·바이오·의료기기 업계가 긴장하고 있다. 업계에선 원료의약품(API) 수급 차질과 물류비 상승, 수출 지연 등이 복합적으로 발생해 기업 수익성이 악화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글로벌 정세 불안이 확산하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이후 안정세를 되찾았던 의약품 공급망과 회복세를 보인 의료기기 수출 성적이 다시 흔들릴 수 있다는 불안감도 있다.

4일 관세청에 따르면 지난해 중동 15개국 향 국산 의약품 수출액은 5억6907만달러(약 8400억원)다. 한국보건산업진흥원에 따르면 2024년 기준 국산 의료기기의 아랍에미리트(UAE) 수출액은 1억4500만달러, 사우디아라비아는 8100만달러로 2020년 이후 각각 연평균 10%, 2% 성장했다.

중동 시장 수출액 절대 규모는 크지 않지만, 중동 국가를 비롯한 해외 시장에 진출한 제약·바이오, 의료기기 기업에도 타격이 있을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특히 원료의약품(API) 수급난에 대한 우려가 크다. 국내 원료의약품 자급도는 2024년 기준 11.9%에 그친다. 약 90%를 중국·인도·일본·프랑스 등에서 수입한다. 직접적인 중동산 비중은 작지만, 해상 운임 상승과 보험료 인상, 환율 급등이 겹치면 수입 원가가 크게 오를 수 있다.

호르무즈 해협은 전 세계 원유 해상 수송량의 약 20%가 통과하는 전략 요충지다. 봉쇄가 현실화할 때 국제 유가와 원·달러 환율 상승이 불가피하고, 이는 곧 제약사의 제조원가 부담으로 이어질 수 있다. 항생제·해열진통제·고혈압약 등 필수 의약품 원료 상당 부분을 해외에 의존하는 일부 제약사들의 부담이 커질 수 있다.

한 제약사 관계자는 "코로나19 당시에도 특정 원료 수급이 막히면서 일부 의약품이 품절 사태를 겪었다"며 "사태가 장기화하면 필수 의약품 중심으로 공급 불균형이 재현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그래픽=정서희

바이오의약품은 합성의약품보다 항공 물류 의존도가 높다. 콜드체인(저온 유통) 유지가 필수이기 때문이다. 중동 노선 항공편이 감축되거나 우회 운항이 늘어날 경우 운임 급등이 불가피하다. 중동 지역에서 임상시험이나 라이선스 협력을 진행 중인 기업도 일정 지연 변수가 생겼다.

업계 관계자는 "항공편 감축이나 해상 운임 급등이 현실화하면 공급 일정 전반에 차질이 불가피하다"며 "또 중동 국가는 정부 발주 비중이 높아, 납기 지연 시 계약 리스크가 커질 수 있다"고 말했다.

중동 지역이 국내 기업들의 주요 수출 시장으로 부상하던 상황에서 국제 정세 불안과 항로 차질이 기업들의 성장 동력을 꺾을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대웅제약(069620)은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 쿠웨이트 등 중동 주요 10개국에서 자사의 보툴리눔 톡신 '나보타'의 품목 허가를 받고 중동 시장 확대 전략을 펼쳐 왔다. 휴젤(145020)도 지난해 아랍에미리트에서 자사의 보툴리눔 톡신 제품 품목 허가를 획득해 중동 진출 길을 열었다. 메디톡스(086900)도 보툴리눔 톡신 '뉴럭스'와 히알루론산 필러 제품인 '뉴라미스'의 핵심 시장으로 중동 국가를 겨냥하고 있다. 회사는 지난해 12월, 중동 최대 의료기기 유통사인 아미코 그룹(AMICO GROUP)과 보툴리눔 톡신, 필러에 대한 독점 공급 계약도 맺었다.

MRI·초음파·임플란트 등 의료기기 업계도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전쟁 장기화로 중동 국가들의 외화 반출 제한이 강화될 경우 대금 회수 지연 가능성도 변수다. 의료기기 회사 관계자는 "당장 직접적인 타격은 없으나, 항공편 감축이나 항로 변경, 입항 회피 등이 발생하면 제품 공급 일정에 차질이 생길 수 있다"고 말했다.

증시도 출렁이고 있다. 제약·바이오주는 경기 방어주로 분류되지만, 원가 상승과 환율 급등이 겹칠 경우 실적 불확실성이 커질 수 있다는 점에서 투자심리가 위축되는 모습이다.

전문가들은 이번 사태가 단기 충격에 그칠지, 공급망 구조 재편으로 이어질지에도 주목하고 있다. 이승규 한국바이오협회 부회장은 "코로나19와 우크라이나 전쟁, 미·중 갈등을 거치며 의약품과 바이오기술은 '산업재'가 아닌 '안보 자산'으로 재평가됐다"며 "의약품 국산화와 전략 비축 필요성도 다시 주목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한편, 보건복지부는 올해 제약·바이오, 의료기기, 화장품을 포함한 바이오헬스산업 수출액 목표치를 작년보다 9.1% 증가한 304억달러(약 45조원)로 제시했다. 지난해 국내 바이오헬스산업 수출액 규모는 279억달러(약 41조원)로 전년보다 10.3% 증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