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이 약 1550억원을 투자하며 힘을 실었던 미국 다중암 조기진단 기업의 핵심 임상이 실패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따라 삼성이 추진해온 혈액 기반 다중암 정밀진단 기술의 상업화 구상에도 제동이 걸릴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미국 혈액 기반 다중암 선별검사 기업 그레일(Grail)은 지난 19일(현지 시각) 보도자료를 통해 영국에서 14만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대규모 임상시험에서 1차 평가지표 충족에 실패했다고 발표했다. 1차 평가지표는 임상 성패를 가르는 핵심 지표로, 통계적 유의성 확보 여부가 승인과 상용화의 분수령이 된다. 해당 지표는 시험 개시 전 규제당국에 제출하는 계획서에 사전 명시된다.
그레일은 혈액 속 수억 개의 DNA 조각 가운데 암과 연관된 미세 DNA를 선별하고, 인공지능(AI) 기반 유전체 분석으로 암 발생 여부와 장기 위치까지 예측하는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회사가 2021년 출시한 다중암 조기진단 검사 '갤러리(Galleri)'는 단 한 번의 혈액검사로 50여 종의 암을 탐지할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회사는 갤러리를 활용하면 암이 1·2기에서 더 많이 발견돼 3·4기 진단 비율이 낮아질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현재까지 약 40만건의 누적 검사 실적을 확보했으며, 영국 국가검진 프로그램 도입 여부 평가를 위해 영국의 보건당국인 국민보건서비스(NHS) 3년간 대규모 임상을 진행해 왔다.
하지만 이번 14만명 대상 임상에서 3기 암 진단이 증가하면서 3·4기 합산 후기암 건수를 평가하는 1차 지표를 충족하지 못했다. 시험군과 대조군 간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차이도 나타나지 않았다. 결과 발표 이후 그레일 주가는 최대 48.54% 급락했다.
이번 임상 실패로 삼성의 사업 계획에도 제동이 걸릴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그레일은 지난해 10월 삼성물산(028260)과 삼성전자(005930)로부터 총 1억1000만달러(약 1조5500억원)를 투자받으며 국내에서도 주목을 받았다.
삼성물산은 해당 투자로 한국 내 갤러리 검사 독점 유통권을 확보했고, 향후 싱가포르·일본 등으로 협력을 확대할 계획이었다. 삼성전자는 그레일의 유전자 기반 조기진단 데이터를 자사 헬스 플랫폼과 연계하는 전략적 협력도 검토 중이다.
혈액 기반 질병 예측 기술은 삼성그룹이 전략적으로 공을 들여온 분야다. 암뿐 아니라 신경퇴행성 질환 조기진단 기술 확보에도 적극적이다.
삼성물산은 지난해 삼성바이오로직스(207940), 삼성에피스홀딩스(0126Z0) 자회사 바이오에피스와 공동 출자한 라이프 사이언스 펀드를 통해 미국 혈액 기반 알츠하이머 검사 기업 C2N 다이그노스틱스(C2N Diagnostics)에 1000만달러(약 145억원)을 투자하기도 했다.
삼성전자 역시 헬스케어 분야 강화를 위해 미국 DNA 분석 장비 업체 엘리먼트 바이오사이언스(Element Biosciences)에 투자했으며, 최근에는 미국 디지털 헬스케어 기업 젤스(Xealth)를 인수했다.
다만 시장에서는 협력 구도가 당장 흔들리지는 않을 것이란 분석도 나온다. 현재 갤러리는 미국 식품의약국(FDA)의 시판허가 심사를 받고 있으며, 그레일 역시 승인 전망에 대해 여전히 자신감을 내비치고 있다. 최근에는 디지털 헬스 플랫폼 기업 힘스앤허스와 판매 계약도 체결했다.
그레일은 2021년부터 미국에서 갤러리를 판매 중이다. 누적 판매량은 50만건, 지난해 판매량은 약 18만5000건이다. 검사 가격은 949달러(약 137만원)다.
이번 영국 임상은 암을 1~2기에 조기 발견해 3~4기 후기암 발생률을 낮추는 것을 목표로 설계됐다. 1차 평가지표는 후기암(3·4기) 진단 건수로, 궁극적으로는 암 사망률 감소 입증이 목적이다. 이번 임상에는 3년간 50~77세 연령대 14만2000명이 참여했다.
그레일은 이번 결과가 영국 NHS 평가지표 기준에 따른 것일 뿐, 갤러리의 유용성을 뒷받침하는 신호는 여전히 확인됐다는 입장이다. 회사 측은 "4기 암 발생이 시험군에서 관찰 기간이 길어질수록 20% 이상 감소하는 경향을 보였다"며 "표준 진료 대비 전체 암(초기·후기) 검출률도 4배 이상 높였다"고 설명했다.
또 검사군에서는 조기 발견 영향으로 3기 암이 더 많이 진단된 반면, 대조군에서는 아직 진단되지 않았을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다. 6~12개월 추가 추적관찰이 이뤄지면 데이터가 개선될 수 있다는 설명이다. 회사 관계자는 "무작위 대조시험에서 다중암 조기검사가 인구집단 규모에서 병기 이동과 전이암 감소 신호를 보인 최초 사례"라고 강조했다.
업계에서는 삼성이 혈액 기반 조기진단과 디지털 헬스케어를 미래 성장축으로 삼고 생태계 구축에 속도를 내왔지만, 이번 임상 결과로 단기 불확실성은 커졌다고 보고 있다. 다만 삼성은 이번 결과보다 FDA 승인 여부를 더 중요한 변수로 보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