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밍버드 바이오사이언스 임직원./허밍버드 바이오사이언스

바이오 산업 강국을 향한 싱가포르의 도전은 이제 단순한 '거점 만들기'를 넘어 글로벌 신약 개발의 실체를 드러내는 단계로 접어들었다. 지식재산과 금융을 연결한 국가 전략은 단기 지원을 넘어 장기 경쟁력을 떠받치는 기반이 됐다. 그 성과가 바이오테크 기업 '허밍버드 바이오사이언스(Hummingbird Bioscience)'의 성장 궤적에서 구체화되고 있다.

허밍버드의 출발은 화려하지 않았다. 2015년 싱가포르 도심 치킨 라이스 식당 위층의 작은 사무실이 전부였다. 연구는 국립암센터 실험실을 빌려 진행했다. 중소기업청(Enterprise Singapore)의 초기 보조금이 개념검증(PoC) 연구의 마중물이 됐다.

미국에서 차세대 항체약물접합체(ADC)의 임상 시험을 진행하는 글로벌 신약 개발사로 성장하기까지는 11년이 걸렸다. 허밍버드는 지난 6일(현지 시각) 미국에서 HER3(인간상피세포성장인자 수용체-3)를 표적으로 한 ADC 'HMBD-501'의 임상 1상 시험에서 첫 환자 투약을 시작했다.

암과 자가면역질환을 겨냥한 단일클론항체(mAb)도 개발하고 있다. 싱가포르와 한국, 대만, 호주, 영국에서 임상이 진행 중인 'HMBD-001'이 대표 사례다. 지난해 호주 퍼체론 테라퓨틱스(Percheron Therapeutics)에 면역관문인자인 VISTA를 표적으로 한 단일클론항체 'HMBD-002'를 수출하며 기술력도 입증​했다.

피어스 잉그램(Piers Ingram) 허밍버드 바이오사이언스 최고경영자(CEO)./허밍버드 바이오사이언스

◇특허가 자금이 되는 나라…세계지식재산기구 '우수 기업' 배출

1980년대부터 생명과학 투자를 이어온 싱가포르는 최근 10여 년간 '연구·혁신·기업(RIE)' 계획을 통해 공공 연구비를 상업화 가능성이 높은 분야에 집중해 왔다. 그 결과 바이오 산업 고용과 창업이 빠르게 늘었다.

피어스 잉그램(Piers Ingram) 허밍버드 바이오사이언스 최고경영자(CEO)는 최근 조선비즈와의 서면 인터뷰에서 "지식재산권 보호 체계와 법·제도 환경, 자본 접근성, 인재 풀, 전략적 입지가 싱가포르를 선택한 이유였다"고 말했다.

허밍버드가 싱가포르를 연구 거점으로 삼은 데에는 지식재산을 자금 조달과 사업 확장으로 연결한 국가 전략도 작용했다. 싱가포르 정부는 2013년 'IP 허브 마스터플랜'을 마련한 뒤 개정을 거쳐 기술 사업화와 금융 연계를 경제 전략의 핵심 축으로 끌어올렸다.

이 틀 아래 싱가포르 기업들은 특허 같은 무형자산을 주식 투자와 대출, 정부 보조금으로 잇는 구조를 갖게 됐다. 또한 정부는 'IP 금융 제도(IPFS)'를 통해 특허 담보 대출을 시범 도입했고, 최근에는 '싱가포르 IP 전략 2030(SIPS 2030)'을 내놓으며 글로벌 허브 도약을 선언했다.

국제 협력도 뒷받침됐다. 세계지식재산기구(WIPO)는 2010년 중재·조정센터를 싱가포르에 설치했다. 제네바 외 지역 첫 사무소였다.

이 같은 제도적 기반 속에서 허밍버드는 지난해 WIPO가 선정하는 '글로벌 어워즈'에서 전 세계 중소·중견 기업 10곳 가운데 하나로 뽑혔다. 잉그램 CEO는 "각국에서 확보한 임상 데이터와 핵심 기술을 철저히 보호하고 있다"며 "혁신이 가치를 만든다면, 지식재산은 그 가치를 지속시키는 장치"라고 했다.

HMBD-501의 작용 기전./허밍버드 바이오사이언스

◇암 넘어 면역질환까지…허밍버드, ADC로 승부수

허밍버드는 ADC 기술을 면역·염증 질환으로까지 확장한다는 전략을 세웠다. 장기 투여가 불가피한 스테로이드나 비스테로이드성 소염진통제(NSAIDs)의 안전성 한계를 정밀 표적 치료로 넘겠다는 구상이다.

잉그램 CEO는 "전 세계적으로 자가면역질환 환자가 늘고 있는 만큼, 차별화된 안전성을 갖춘 치료제가 ADC 분야에서 나올 여지가 크다"고 말했다.

회사는 향후 5년 안에 전체 파이프라인의 약 3분의 1을 면역·염증 질환용 ADC로 채운다는 목표다. 현재 본사가 직접 개발 중인 ADC는 HMBD-501이 유일하다. 추가 후보물질 세 건은 미국 자회사 칼리오 테라퓨틱스(Callio Therapeutics)에 기술이전했다.

잉그램 CEO는 "여러 면역·염증 질환을 겨냥한 전임상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며 "표적은 공개할 수 없지만 후보물질 발굴과 약물 설계 역량을 결합해 차별화를 꾀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단기적으로는 주요 파이프라인 임상을 진전시키고 면역질환 ADC를 임상 단계로 끌어올리는 데 집중하고 있다"며 "장기적으로는 기업공개(IPO)와 글로벌 제약사와의 전략적 제휴 등 다양한 선택지를 열어 두고 있다"고 말했다.

허밍버드는 지금까지 여섯 차례 투자 유치를 통해 총 1억5000만달러(약 2160억원)를 조달했다. 2021년 노보홀딩스가 주도한 1억2500만달러(약 1800억원) 규모의 시리즈C가 대표적이다. 시리즈B 라운드에는 미래에셋캐피탈 등 한국 투자사들도 참여했고, SK(034730)도 시리즈B 익스텐션에서 약 80억원을 투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