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중견 제약사들이 올해 하반기 본격 시행될 약가제도 개편을 앞두고 사업 구조의 취약 지점을 다시 들여다보고 있다. 그동안 '안전한 현금 창출원'으로 작동해온 내수·제네릭(복제약) 중심 모델이 정부 정책 변화 앞에서 구조적 한계에 직면하면서다. 업계 안팎에서는 이번 약가 개편이 중견 제약사들의 체질을 가르는 분기점이 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일러스트=챗지피티

◇'안전한 현금원'의 붕괴…약가 인하 대상 75.1%가 중견기업

'제약바이오산업 발전을 위한 약가 제도 개편 비상대책위원회'가 제조시설을 보유한 제약사 59곳을 대상으로 실시해 지난 7일 발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기등재 약제 가운데 최초 산정가의 53.55% 수준에서 유지되고 있는 품목들의 약가가 40%대로 인하될 경우 연간 예상 매출 손실액은 총 1조2144억원에 이를 것으로 추산됐다. 기업당 평균 손실 규모는 233억원이다.

설문에는 연매출 1조원 이상 대형 제약사 7곳을 비롯해 연매출 1000억원 이상~1조원 미만 중견기업 42곳, 연매출 1000억원 미만 중소기업 10곳이 참여했다.

충격은 기업 규모별로 차등화될 전망이다. 매출 손실률은 중소기업이 10.5%로 가장 컸고, 중견기업 6.8%, 대형기업 4.5% 순으로 나타났다. 다만 약가 인하 대상 품목 수로 보면 중견기업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전체 4866개 품목 가운데 중견기업이 보유한 품목은 3653개로 75.1%에 달했다.

영업이익 감소 폭은 더욱 가파르다. 기업들은 약가 인하가 시행될 경우 기업당 평균 51.8%의 영업이익 감소를 예상했다. 특히 중견기업의 예상 영업이익 감소율은 55.6%로 가장 높았고, 대형기업(54.5%)과 중소기업(23.9%)이 뒤를 이었다.

제약사들은 이 같은 실적 악화가 연구개발(R&D) 투자 축소와 고용 위축으로 이어질 수 있다며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다만 건강보험 재정 부담 완화를 앞세운 정부의 정책 추진 의지가 강한 만큼 제도 개편의 큰 방향이 바뀔 가능성은 크지 않다는 관측이 우세하다.

한 제약업계 관계자는 "제약산업은 인허가와 건강보험 등재라는 핵심 관문을 정부가 쥐고 있는 전형적인 규제 산업"이라며 "건강보험 재정 압박 국면에서는 정책적으로 가장 먼저 조정 대상이 되기 쉬운 구조"라고 말했다.

그는 "결국 자체 R&D 성과와 글로벌 시장 진출 여부가 기업 생존을 가르는 기준이 될 수밖에 없다"며 "제네릭 의존도가 높을수록 이번 제도 개편의 충격은 더 클 것"이라고 덧붙였다.

신용평가사 역시 같은 맥락의 진단을 내놓고 있다. 한국신용평가는 올해 제약바이오산업 전망을 '중립적'으로 제시하면서도, R&D 투자가 사실상 필수 조건이 된 만큼 이를 감당할 수 있는 재무 체력의 중요성이 한층 커졌다고 분석했다.

김수민 한국신용평가 수석애널리스트는 "이번 약가 제도 개편은 복제약 의존도가 높은 중소형 제약사의 수익성에 직접적인 하방 압력으로 작용할 것"이라며 "단순 복제약 생산에서 벗어나 연구개발을 통한 차별화를 강요받는 환경이 본격화될 것"이라고 말했다.

2022년 10월 25일 윤웅섭 당시 일동제약 대표이사 부회장이 서울 광진구 그랜드 워커힐 서울에서 열린 '2022 세계 바이오 서밋'에서 주제 발표를 하고 있다./뉴스1

◇오너가 나선 일동제약…2016→2023년 연구개발비 4배↑

이 같은 환경 변화 속에서 이번 약가 충격을 상대적으로 덜 받을 것으로 평가되는 기업들도 있다. 이미 수년 전부터 제네릭 중심 구조의 한계를 인식하고 사업 방향을 바꿔온 곳들이다. 일동제약(249420)삼진제약(005500)이 대표적이다.

일동제약은 오너가 직접 성장 전략의 방향을 틀었다. 윤웅섭 회장은 2014년 대표이사 취임 이후 지주사 전환과 기업 체제 재편을 주도하며 지배구조와 사업 포트폴리오를 정비했고, 이후 의약품과 헬스케어를 양대 축으로 한 사업 구조를 확립했다. 신약 연구개발은 이 전략의 핵심이었다.

윤 회장의 선택은 수치로도 확인된다. 일동제약의 연구개발비는 2016년 212억원에서 2023년 974억원으로 4배 이상 증가했고, 매출 대비 연구개발비 비중도 같은 기간 10% 초반에서 16%대로 확대됐다.

최근 윤 회장의 회장 승진 역시 이 같은 중장기 전략이 다음 단계로 진입했음을 보여준다. 윤 회장은 승진 이후 첫 공식 행보로 12일(현지 시각)부터 미국에서 열리는 세계 최대 제약바이오 투자 행사 'JP모건 헬스케어 콘퍼런스(JPMHC)'에 참석해 신약 파이프라인을 소개할 예정이다.

현재 일동제약그룹은 대사성 질환과 위장관 질환, 자가면역질환, 고형암 분야에서 다수의 신약 파이프라인을 확보하고 있다. 이번 행사에서는 GLP-1 계열 비만·당뇨 치료제와 P-CAB 계열 소화성궤양 치료제를 주로 소개할 전망이다.

이명선 DB증권 연구원은 "경구용 GLP-1 계열 약물은 그간 간 독성 이슈가 반복적으로 제기돼 왔지만, 일동제약의 후보물질 'ID110521156'은 간 기능과 관련한 모든 주요 지표에서 개선된 임상 데이터를 확보했다"며 "이를 바탕으로 글로벌 기술이전 계약 가능성도 기대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

김상진 삼진제약 사장이 지난 5일 서울 마포구 삼진제약 사옥에서 열린 2026년 시무식에서 신년사를 하고 있다./삼진제약

◇고부가 치료 영역으로 옮긴 삼진제약…코프로모션 성과 가시화

삼진제약은 보다 점진적인 방식으로 같은 문제에 대응하고 있다. 기존 영업력과 외부 협업을 활용해 제네릭 의존도를 낮추는 전략이다. 대표적인 수단이 코프로모션이다. 다른 제약사가 개발하거나 해외에서 도입한 의약품을 국내에서 공동으로 판매·마케팅하는 방식이다.

성과도 가시화되고 있다. 지난해 선보인 면역증강 인플루엔자 백신 '플루아드'와 세포배양 백신 '플루셀박스'는 출시 첫 분기(2025년 7~9월)에만 36억원의 매출을 기록했다. 2024년 출시한 붙이는 진통제 '노스판 패취'는 연 매출 100억원 안팎이 기대되는 품목으로 성장했다.

삼진제약은 올해 항암·폐동맥고혈압 사업부도 신설했다. 가격 규제의 영향을 상대적으로 덜 받는 전문 치료 영역으로 포트폴리오를 옮기겠다는 의미다.

특히 항암 분야에서는 기존 세포독성 항암제 위주의 제품 구성에서 벗어나, 경구용 표적치료제 비중을 늘리는 방향을 모색 중이다. 최근 생물학적 동등성 시험에 착수한 유방암 치료제 '입랜스' 제네릭 'SJP364'이 한 예다.

R&D 부문에서도 조정이 이뤄지고 있다. 삼진제약은 지난해 3분기 MASH(대사이상 관련 지방간염) 관련 파이프라인 4개를 정리했다. 대사질환 전반을 포괄하는 GLP-1 계열 비만 치료제로 축을 옮기기 위해서다. 총 12개에 달하는 항암 파이프라인은 기술이전 가능성을 염두에 둔 구조로 재편 중이다.

최종경 흥국증권 연구원은 "고부가·고난이도 치료 영역 확장과 코프로모션 품목의 성장 가속화는 삼진제약이 그동안 가장 잘해왔고, 앞으로도 경쟁력을 발휘할 수 있는 영역"이라며 "이를 바탕으로 올해 매출액은 3251억원으로 전년 대비 5.4% 증가하고, 영업이익은 290억원으로 10.9% 늘어나 영업이익률은 8.9%를 기록할 것"이라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