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질병의 해법으로 기대를 모았던 마이크로바이옴(장내 미생물) 치료제가 국내에서는 뚜렷한 임상 성과를 내지 못하면서 제동이 걸렸다. 신약 개발의 불확실성이 커지고 투자심리도 위축되자, 관련 기업들은 화장품·건강기능식품 등 비교적 빠른 수익이 가능한 사업으로 무게중심을 옮기고 있다.
마이크로바이옴은 인체에 공존하는 세균·바이러스 등 미생물 생태계를 의미한다. 영양분 대사와 면역 조절에 관여해 비만·당뇨병·고지혈증 등 대사질환뿐 아니라 암, 뇌질환과도 연관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때문에 마이크로바이옴 연구는 다양한 질병 분야에 적용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를 받아왔다.
4일 업계에 따르면 국내 마이크로바이옴 치료제 개발은 임상 후반부로 갈수록 자금 부담과 상업화 불확실성이 커지며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
신약 하나를 상용화하기까지 수백억원이 투입되지만 성공 사례가 드물어 투자 유치도 쉽지 않다. 이에 일부 기업들은 신약 개발을 축소하거나 중단하고, 기존 기술을 활용한 화장품·건강기능식품 사업으로 전략을 전환하는 모습이다.
이 같은 흐름을 가장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지놈앤컴퍼니(314130)다. 2015년 설립돼 2020년 코스닥 시장에 상장한 지놈앤컴퍼니는 국내 최초로 마이크로바이옴 면역항암제 임상에 진입하며 주목받았다.
그러나 항암 마이크로바이옴 치료제 후보물질인 'GEN-01'과 독일 머크·미국 화이자의 면역항암제 '바벤시오(성분명 아벨루맙)'을 병용한 국내 임상 2상에서 유의성을 입증했지만, 이후 임상 3상에는 진입하지 않기로 하면서 개발이 중단됐다.
회사는 임상 3상에 수백억원이 투입되는 데 비해 시장성과 상업화 성공 가능성이 불확실하다는 점을 이유로 들었다. 한때 매출의 약 80%를 차지했던 마이크로바이옴 위탁개발생산(CDMO) 사업도 현재 정리 중이다.
지놈앤컴퍼니는 대신 항체-약물접합체(ADC) 중심의 항암제 개발과 마이크로바이옴 기반 화장품 사업에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 특히 마이크로바이옴 화장품 브랜드 '유이크(UIQ)'는 미국·일본·중국·인도네시아 등 해외 여러 국가에 진출하며 회사의 주요 수익원으로 자리 잡았다.
이런 흐름은 다른 마이크로바이옴 개발사에서도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건선과 장질환 치료제를 개발해온 고바이오랩(348150)은 건선 치료제 임상 2상에서 주요 유효성을 확보하지 못하면서 난관에 부딪혔다. 업계는 후속 임상 진입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고 있다.
다만 회사는 비만 치료제 분야를 새로운 돌파구로 삼고, 비만 치료 균주에 대한 미국 특허를 등록해 체중 조절과 대사질환 개선을 목표로 한 경구용 치료제 개발을 추진 중이다.
CJ제일제당(097950)이 출범시킨 CJ바이오사이언스도 상황은 녹록지 않다. 2023년 영국 4D파마로부터 신약 파이프라인 11개를 인수해 총 15개로 확대하고, 미국 머크(MSD)의 면역항암제 '키트루다'와 면역항암 후보물질 'CJRB-101'의 병용 임상을 한국·미국에서 진행 중이다.
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인 천종식 대표가 창업한 천랩을 인수해 2022년 4월 마이크로바이옴 신약 개발사로 출범했지만, 개발 속도가 더딘 데다 연구개발(R&D) 투자 부담이 커지며 매년 영업손실을 이어가고 있다. 올해 3분기 누적 적자는 196억원에 달했다.
회사는 지난 7월 윤상배 전 휴온스(243070) 대표를 신임 대표로 영입했다. 윤 대표가 CJ제일제당의 건강기능식품 자회사인 CJ웰케어 대표를 겸직하고 있는 만큼, 향후 R&D 자금 확보를 위해 건기식 사업과의 연계 가능성도 거론된다.
업계는 마이크로바이옴 치료제 성과 부진의 배경으로 까다로운 임상 설계와 승인·상업화 사례의 부족을 꼽는다. 전 세계에서 150개 이상의 마이크로바이옴 치료제가 개발 중이지만, 현재 미국 식품의약국(FDA) 승인을 받은 제품은 단 2개에 불과하다. 규제 당국 역시 명확한 평가 기준을 아직 축적 중인 단계로, 제약사와 투자자 입장에서는 선례가 부족한 고위험 분야라는 평가다.
같은 마이크로바이옴 기술이라도 화장품이나 건기식, 프로바이오틱스는 규제 부담이 상대적으로 적고 빠른 매출 창출이 가능하다.
이 때문에 신약 개발의 불확실성이 커질수록 기업들이 해당 분야로 눈을 돌리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정부가 추진 중인 '국가 마이크로바이옴 이니셔티브' 역시 단기 연구 지원에 그치고 있어, 보다 장기적이고 일관된 정책 지원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마이크로바이옴 업계 한 관계자는 "마이크로바이옴 치료제는 개인별 차이가 크고 작용 원리가 복합적인 만큼 임상에서 일관된 효과를 입증하기가 쉽지 않다"며 "정부 과제가 단기 연구 중심으로 운영되다 보니 임상 후반부까지 끌고 갈 수 있는 자금과 제도적 뒷받침이 부족한 것도 현실"이라고 말했다.
이어 "장기적인 관점에서 임상·규제·상업화를 연계한 지원 체계가 마련되지 않으면 기업들의 신약 도전은 계속 위축될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