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물 전달(drug delivery)은 오랫동안 의학계의 핵심 연구 분야였다. 리포솜·미셀·덴드리머 등 유기·무기 기반 나노입자는 암세포 등 특정 장기에 약물을 정확히 전달하기 위해 개발돼 왔고, 이 기술은 결국 독실(Doxil), 아브락산(Abraxane) 같은 블록버스터 항암제로 이어졌다. 약물 용해도 개선, 장기 표적화, 체내 순환 시간 연장 등 나노기술이 제공하는 장점 덕분이었다.
그런데 이 기술을 식물에 적용해 농업에 '정밀 전달'이라는 새로운 접근을 한 연구자가 있다. 싱가포르국립대(NUS)의 테드릭 토마스 살림 류(Tedrick Thomas Salim Lew) 조교수다. 그의 연구실은 재료과학·화학·식물생물학을 아우르며 식물이 스트레스를 감지하고 대응하는 방식을 연구한다. 목표는 단순하다. 기후변화 시대, 식물이 더 잘 버티도록 만들기 위해서다.
류 교수는 지난 5일(현지 시각) 싱가포르 센트럴 에어리어에서 조선비즈와 만나 "의학계는 수십 년간 나노입자 표면을 화학적으로 조절해 폐·신장·종양 등 원하는 장기에 약물을 정확히 보내는 연구를 해왔다"며 "그런데 농업계에서는 '왜 비료나 농약은 여전히 무작위 살포(spraying)에 의존할까'라는 질문을 아무도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낭비되는 비료·농약 90%…'기공'에서 해법 찾다
류 교수의 문제의식은 의외의 곳에서 출발했다.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 박사 과정 시절, '동물에 쓰는 나노입자를 식물에도 적용해보자'는 발상을 떠올린 것이다. 당시 지도교수였던 마이클 스트라노(Michael Strano)의 영향이 컸다. 스트라노는 나노소재를 세포 내부로 전달하는 기술 분야에서 세계적 권위를 가진 학자다.
실제로 농업 현장에서 살포되는 비료·농약 중 식물 잎에 남는 비율은 10% 미만으로 알려져 있다. 나머지 90%는 토양과 하천으로 흘러가 녹조나 적조 같은 환경 문제를 일으킨다. 비용 낭비도 크다.
류 교수가 주목한 건 식물 잎 표면에 있는 미세공, 즉, 기공(stomata)이다. 기존 연구들이 잎 내부의 세포기관(핵·미토콘드리아 등)을 겨냥한 '심층 전달(deep delivery)'에 집중해온 것과 달리, 그는 "문이 있는 곳부터 해결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류 교수는 "기공은 식물이 숨 쉬는 입이자 박테리아가 침입하는 출입구"라며 "이 부분이 열린 채 노출돼 있으면 병원균이 그대로 침입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기공 표면의 특정 당(sugar)에 달라붙도록 나노입자 표면을 화학적으로 설계했다. 이른바 'SENDS(surface ligand-engineered nanoparticles for targeted delivery to stomata)' 기술이다. 항균 기능을 가진 나노입자가 기공에 '착 달라붙어' 박테리아 침입을 차단하고, 동시에 비료·농약의 흡수 효율을 높인다.
효과는 뚜렷했다. 전통적 살포 방식 대비 최대 20배 높은 흡수·전달 효율이 확인됐다. 류 교수는 "나노입자는 일종의 '문지기(guard)'처럼 기공에 붙어 기다린다"며 "해로운 박테리아가 들어오려 하면 그 자리에서 먼저 억제한다"고 말했다.
기술은 아직 실험실 단계지만 산업계 관심은 상당하다. 싱가포르는 식량의 90%를 수입하는 도시국가로, 2030년까지 식량자급률 30% 달성을 목표로 하고 있다. 류 교수의 기술이 도시형 농업의 생산성과 안정성을 높일 수 있는 새로운 도구로 주목받는 이유다.
류 교수는 "효과는 매우 고무적이지만 실제 농장에서 같은 성능이 나오는지 확인하려면 더 큰 규모의 시험이 필요하다"며 "현재 싱가포르 기업들과 현장 실증 파트너십을 논의 중"이라고 말했다. 문서 절차가 마무리되면 내년부터 본격 착수할 예정이다.
◇"기술보다 어려운 건 신뢰 구축"…고가의 비용도 숙제
하지만 나노기술의 농업 적용에는 넘어야 할 장벽이 있다. 류 교수는 "사람들이 '나노기술'이란 말을 들으면 우선 걱정부터 한다"고 말했다. '몸에 좋지 않을 것'이란 오해 때문이다.
류 교수는 "그래서 자연에서 분해될 수 있는, 보다 환경 친화적인 나노입자를 개발하고 있다"며 "우리가 먹는 단백질이나 공기 중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나노입자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설명했다. 그는 "인간은 치약이나 각종 소비재에서 이미 수많은 나노입자에 노출돼 있다"며 "대규모 적용을 위해선 식품에 쓰여도 안전하다는 점을 명확히 입증해야 한다"고 말했다.
대중의 인식은 규제에도 영향을 준다. 류 교수는 "규제는 결국 대중의 인식에서 출발한다"며 "나노입자가 이미 우리 주변에 널리 존재한다는 사실을 대중과 정책결정자에게 설득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코로나19 등 백신에 든 나노입자는 자발적으로 주입하지 않느냐"며 "같은 나노입자를 식물에 적용해 그 식품을 먹는다고 해서 유전적 변형이나 건강 문제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고 강조했다.
비용도 문제다. 류 교수는 "현재 연구 범위가 제한되는 이유는 화학적 접근 방식이 단백질을 사용하기 때문"이라며 "단백질은 비싸다"고 말했다. "기공 표적화가 가능한 이유는 항체 기반 기술 덕분인데, 항체 역시 단백질"이라고 했다.
류 교수는 "의학에 쓰이는 기술은 고가여도 사람들이 수용하지만, 채소처럼 값싼 작물에는 사람들이 그만한 비용을 쓰려 하지 않는다"며 "기공이 식물 보호에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는 이미 과학적으로 입증했다. 앞으로는 동일한 효과를 훨씬 저렴하게 구현할 수 있는 소재와 화학적 접근을 개발하는 데 집중할 것"이라고 했다.
참고 자료
Nat Commun(2025), DOI: https://doi.org/10.1038/s41467-025-60112-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