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앞에 어머니의 고통을 덜어주고 소중한 일상을 되찾아 줄 수 있는 약이 있는데도, 저희는 경제적인 이유로 선뜻 치료를 시작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대신 어머니는 온몸으로 힘든 과정을 견뎌내야 하는 표준 항암치료를 받고 계십니다. 희망을 보았기에 지금의 현실이 더욱 안타깝게 다가옵니다."

일라이 릴리의 폐암 표적치료제 '레테브모'에 대한 신속한 건강보험 적용을 요구하는 국민청원에 담긴 호소다. 이 청원은 28일 오늘 종료된다.

청원인은 최근 어머니가 폐암 4기 진단을 받았다고 밝혔다. 그는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지만, 'RET 변이'를 겨냥하는 신약 레테브모가 있다는 사실이 한 줄기 희망이 됐다"며 "그러나 한 달 800만원에 달하는 약값을 보며 그 희망이 너무 멀게 느껴졌다"고 적었다.

일라이 릴리의 폐암 표적치료제 '레테브모'./일라이 릴리

업계는 이러한 상황이 반복되는 이유로 한국의 낮은 약가와 더딘 보험 등재 절차를 꼽는다. 이 때문에 글로벌 제약사들은 한국에서 판매 허가를 받았더라도 보험 등재를 미루는 이른바 '코리아 패싱'을 택해왔다. 중국이 2018년 한국을 참조가격국으로 지정한 뒤 이 흐름은 더 뚜렷해졌다. 한국 약가가 중국 약가 인하의 근거로 쓰이면서 제약사의 수익성 방어 부담이 커졌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신약 허가 후 건강보험 급여 적용까지 평균 46개월이 걸린다. 일본(17개월), 영국(27개월), 프랑스(34개월)은 물론 OECD 평균(45개월)보다도 길다. 그만큼 환자가 신약을 사용할 기회는 늦어진다. 미국제약협회(PhRMA)에 따르면 2012~2021년 미국·유럽·일본에서 승인된 460개 신약 가운데 한국에 1년 내 도입된 비율은 5%로, OECD 평균(18%)의 3분의 1 수준이다.

◇정부, 신약 경제성 평가 기준 손본다…ICER 적용 '탄력화'

정부는 이러한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점증적 비용·효과비(ICER) 기준을 보다 탄력적으로 적용한다는 방침을 내놨다. 앞서 유방암 치료제 ADC(엔허투·트로델비), 담도암 치료제 임핀지 병용요법 등에서 ICER를 유연하게 적용해 급여 등재를 결정한 사례를 제도 방향에 반영한 것이다. 정부는 내년 상반기 비용효과성 임계값과 가중치 도입 방식을 검토하는 정책 연구를 진행하고, 결과를 토대로 2027년부터 새로운 기준을 적용할 계획이다.

ICER는 신약이 기존 치료보다 어느 정도 효과가 더 있고, 그 효과를 얻는 데 얼마의 비용이 더 필요한지를 따지는 지표다. 국내에서는 ICER가 5000만원 이하일 경우 건강보험 적용 가능성이 커진다. 다만 기존 치료제 가격이 지나치게 낮거나 신약이 생존 기간을 크게 늘릴수록 오히려 ICER가 불리하게 나오는 구조적 한계가 있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2018~2022년 약제급여평가위원회에서 경제성 평가를 거쳐 급여가 인정된 신약 20개 성분의 ICER는 1778만~4792만원 수준이었다. 중앙값은 일반약제 2567만원, 항암제 3999만원, 희귀질환 치료제 3997만원으로 나타났다.

서울의 한 대학병원 풍경

◇평가·등재 방식도 바뀐다…"적응증별 약가제 도입은 과제"

정부는 또 2028년부터 유전체 기반 항암제 등 혁신 신약의 가치를 적정하게 평가하는 '신속등재–후평가·조정' 트랙도 도입할 계획이다. 혁신 신약 전반에 신속등재 절차를 확대하고, 인공지능(AI) 기반 디지털 헬스케어 기술로 실제 진료 데이터를 분석한 뒤 사후 약가 조정으로 이어지는 구조다.

업계는 이번 개선안에 대해 "방향성은 긍정적"이라고 평가하면서도 과제가 남아 있다고 지적한다. 대표적으로 적응증별 약가 제도 도입이 꼽힌다.

현행 규정상 급여 심사 기간은 8개월이지만, 적응증이 추가된 약제에는 심사 기간 제한이 없어 훨씬 더 많은 시간이 걸린다. 실제로 다중 적응증 약제의 급여 적용에는 평균 30개월이 소요돼 단일 적응증 약제보다 4배가량 늦다는 연구도 있다. 폐암·담도암에 쓰이는 면역항암제 임핀지 병용요법이 대표적이다. 미국·영국·일본·독일·호주 등 주요 국가는 해당 요법에 대해 허가와 동시에, 혹은 10개월 이내 급여를 적용했지만 한국에서는 2022년 11월 허가 이후 21개월째 급여 논의가 이어지고 있다.

한 제약업계 관계자는 "면역항암제나 ADC처럼 다중 적응증 신약이 빠르게 치료 패러다임을 바꾸고 있는 만큼, 한국도 글로벌 흐름에 맞춘 제도 개선이 폭넓게 이뤄지길 기대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