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만 치료제가 체중 감량뿐 아니라 당뇨병, 심장병 등 대사·심혈관 질환 진행을 늦추는 효과까지 확인되면서 세계 시장이 급성장하고 있다. 미국 일라이 릴리와 덴마크 노보 노디스크가 세계 시장에서 양강 구도를 형성한 가운데, 국내에서 개발하고 있는 비만 치료 신약 후보물질들이 시장의 주목을 받고 있다.
국내 기업들은 기존 비만약에 새로운 표적을 추가한 신약을 개발하면서 부작용을 줄이는 한편, 약효 기간을 늘려 투약 횟수를 줄이는 방법으로 환자 편의성을 높이고 있다. 또 주사제를 먹는 약인 경구제(經口劑)로 바꾸는 개발도 진행되고 있다. 국내 기업들은 내수 시장은 물론, 기술 수출을 통해 해외 시장까지 노리고 있다.
◇한미약품, 국민 비만약 성과로 세계 시장 진출 전략
비만 치료제 개발에서 가장 앞선 국내사는 한미약품(128940)이다. 최근 글루카곤 유사 펩타이드(GLP)-1 계열 비만 신약 후보 물질인 '에페글레나타이드(efpeglenatide)'의 안전성과 체중 감량 효과를 확인한 임상 3상 시험 결과를 발표해 관심을 모았다.
한미약품의 임상 3상 시험은 국내 대학병원에서 당뇨병이 없는 성인 비만 환자를 대상으로 진행됐다. 회사에 따르면 투여 40주차에 평균 9.75% 체중 감량률을 확인했다. 일부 환자는 투약 40주차에 30%에 이르는 감량률도 보였다. 한미약품은 해당 임상 3상 결과를 바탕으로 연내 국내 품목 허가를 신청해 내년 말쯤 출시를 목표로 하고 있다.
한미약품의 비만약이 성공하면 글로벌 제약사들이 장악한 국내 시장에 한국산 신약이 처음 등장하는 것이지만, 임상시험이 국내에 한정됐다는 점에서 내수용에 그친다는 한계가 있다.
글로벌 임상시험은 국내 임상시험보다 더 복잡하고 막대한 비용이 든다. 인종을 고려해 임상시험을 설계해야 하고 임상시험에 참가할 병원·환자를 모집하기도 만만치 않다. 국내 기업들이 기술 이전을 통해 글로벌 임상시험을 추진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한미약품은 국내에서 에페글레나타이드를 '국민 비만약'으로 먼저 성공시키고, 그 수익을 다른 비만 신약 후보물질 5종 개발에 투자해 글로벌 기술 수출 가능성을 높이는 것을 전략으로 삼은 것으로 풀이된다. 회사에 따르면 이 약물은 체질량지수(BMI·체중(㎏)을 키의 제곱(㎡)으로 나눈 값)가 30 이하인 여성에서 효과가 더 컸다. 초고도 비만이 적은 한국인에 맞는 비만약이 될 수 있다는 의미다.
◇일동제약·디앤디파마텍, 먹는 비만약서 성과
현재 시장에서 판매 중인 노보 노디스크의 위고비와 일라이 릴리의 마운자로는 둘다 환자가 직접 피부에 찔러 주사하는 피하 주사제로, 매주 한 번씩 투여해야 한다. 그만큼 환자가 불편하고 약값 부담도 크다. 최저 용량짜리 한달치가 20만원대, 최고 용량이 40만~50만원 수준이다. 이런 문제로 환자가 임의로 치료를 중단하거나 불규칙하게 투여하는 게 주요 한계로 지적됐다.
국내 기업들은 기존 비만약의 한계를 극복해 차별화를 노리고 있다. 일동제약(249420)의 연구개발(R&D) 전문 자회사인 유노비아와 이강춘 성균관대 약대 석좌교수와 이슬기 미국 존스홉킨스대 의대 교수 부자(父子)가 설립한 디앤디파마텍(347850)이 경구용 비만 치료 신약을 개발 중이다.
일동제약은 지난 29일 기업설명회(IR)에서 자체 개발 중인 경구용 GLP-1 계열 비만 신약 후보 물질 'ID110521156'의 임상 1상 시험 결과를 발표했다. 국내 성인 36명 대상 임상시험에서 하루 한 번 복용한 결과, 고용량(200㎎) 투약군은 4주 뒤 체중이 평균 9.9%(8.8㎏) 줄었다.
이는 앞서 일라이 릴리가 먹는 비만약으로 개발 중인 '오포글리프론'과 스위스 로슈의 먹는 비만 약 후보 물질 'RG6652′의 임상시험에서 확인된 체중 감량 데이터보다 뛰어난 수치다. 오포글리프론은 4주차 고용량 투여군에서 6.4%의 감량률을, 로슈의 RG6652는 7.3%의 감량률을 보였다.
일동제약은 내년에 임상 2상 시험을 미국에서 진행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재준 일동제약 최고운영책임자(COO) 겸 유노비아 대표는 "ID110521156은 기존 펩타이드 주사제보다 제조 효율·경제성과 사용 편의성이 높다"며 "생산 단가도 월등히 낮아 상업화에 유리할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31일 디앤디파마텍의 주가가 신고가를 기록했다. 화이자에 이어 노보 노디스크가 미국 비만약 개발사 멧세라에 인수 제안을 한 소식이 보도된 영향이다. 디앤디파마텍은 2023년과 지난해 두 차례에 걸쳐 멧세라에 경구용 GLP-1 계열 'DD02S'를 비롯해 비만 신약 후보물질을 6종을 약 1조1000억원 규모에 이전했다.
회사는 오는 6일 경구용 비만 신약 후보 물질 'MET-GGo'의 전임상시험 결과도 최초 공개한다. 이 후보 물질은 GLP-1과 함께 위 억제 펩타이드(GIP)에도 작용하는 이중 작용제이다. GIP는 지방세포를 분해하고 메스꺼움을 줄여준다고 회사는 밝혔다. 이슬기 디엔디파마텍 대표는 "MET-GGo는 멧세라의 첫 경구용 비만 치료제인 만큼 시장의 큰 관심이 예상된다"고 말했다.
◇약효 지속형 기술 가진 기업들도 관심
다른 기업들도 차별화된 기술로 도전하고 있다. 지투지바이오(456160)는 월 1회 투여 가능한 비만 치료제 플랫폼을 개발 중으로, 내년 임상시험 진입을 계획하고 있다. 이 회사는 약효를 지속시키는 기술 '이노램프' 플랫폼을 보유하고 있다.
이노램프는 쉽게 설명하면 작고 둥근 입자인 미립구에 약을 담아 몸안에서 천천히 방출되도록 하는 기술이다. 그만큼 주사 투여 간격을 늘릴 수 있다. 회사는 이 기술을 적용해 기존 주 1회 투여 방식의 비만약을 월 1회, 월 3회 투여 형태로 바꾸는 데 도전하고 있다.
지투지바이오에 따르면 위고비의 성분인 세마글루타이드 1개월 제형 개발을 완료하고 내년 상반기 임상시험 진입을 목표하고 있다. 3개월 제형도 개발 중이다. 이 회사는 독일 베링거인겔하임을 비롯해 글로벌 대형 제약사 4곳과 각각 약효 지속성 주사제를 공동 개발하는 연구 협력 계약을 맺고 비만약뿐 아니라 조현병·치매 신약 후보 물질도 개발 중이다.
펩트론(087010)도 지난해 일라이 릴리와 장기 지속형 제형 기술에 대한 기술평가 계약을 체결하고 공동 연구를 하고 있다. 시장에선 기술 이전 본 계약으로 이어질 수 있을지 주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