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하나를 개발해 승인까지 받는 데 10년 넘는 시간과 20억달러(한화 2조원) 이상 비용이 듭니다. 실패율은 90%가 넘죠. AI(인공지능)로 발굴한 신약 후보물질이 첫 승인을 받는 순간, 제약 산업은 지속 가능한 구조로 바뀔 겁니다."
마티 길(Mati Gill) 이스라엘 아이온랩스(AION Labs) 대표(CEO)는 지난 28일 서울 워커힐호텔에서 조선비즈와 만나 "AI 신약개발의 진가는 아직 입증되지 않았지만, 향후 5년 내에 첫 승인 신약이 나올 것"이라며 이같이 말했다. 길 CEO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공식 경제인 행사인 '딥스 글로벌 테크콘' 참석차 방한했다.
아이온랩스는 미국 화이자와 영국 아스트라제네카, 독일 머크, 이스라엘 테바 등 글로벌 대형 제약사(빅파마)와 세계 최대 클라우드(가상서버) 서비스 기업인 미국 아마존웹서비스(AWS)가 함께 설립한 AI 기반 신약개발 협력체다. 길 대표는 테바에서 법무 부문 최고운영책임자(COO)와 정부 대관 담당 이사를 지냈다. 이스라엘을 비롯해 아시아태평양, 유럽, 중동, 남미 지역을 두루 경험한 인물이다.
길 대표는 "아이온랩스는 스타트업을 창업하고 인수합병(M&A)이나 기업공개(IPO) 등으로 투자금과 수익을 회수하는 전통적인 벤처캐피털(VC)이나 엑셀러레이터(AC)와는 성격이 다르다"며 "신약 개발의 공통 과제를 선정하고, 이를 해결할 연구자들을 모아 스타트업을 직접 설립·육성하는 '벤처 스튜디오(venture studio)' 방식"이라고 설명했다.
벤처 스튜디오는 VC와 달리, 아이디어 구상부터 자금 지원, 경영 지원, 인력 확보까지 회사 설립 전반에 걸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기업 모델이다. 아이온랩스는 연구자들을 대상으로 신약 개발 아이디어를 모집해 기술을 선별한 뒤, 해당 기술을 기반으로 스타트업을 세우고 성장시키고 있다.
현재까지 이런 방식으로 총 9개의 스타트업이 탄생했다. 스타트업당 초기 자금은 약 100만달러(14억3000만원) 수준이다. 아이온랩스가 설립한 스타트업들은 아스트라제네카·화이자·머크·테바 등 빅파마의 부문별 전문가들로부터 매달 정기적인 조언과 자문을 받는다.
기존 신약 개발은 초기 단계인 신약 후보물질 발굴에만 수년, 수천억원이 들지만 성공률은 10%에 못 미친다. 신약 개발에 AI가 결합하면 방대한 생물·화학 데이터를 학습해 유망 후보를 빠르게 도출할 수 있어, 개발 기간과 비용을 동시에 줄이고 성공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
이스라엘이 AI의 가능성에 주목하고 먼저 움직였다. 2018년 이스라엘 정부는 AI·머신러닝·컴퓨팅 기술을 결합한 '바이오 융합(bioconvergence)' 산업을 차세대 국가 전략산업으로 지정하고, 민관 협력을 통한 혁신 연구소 설립을 추진했다. 당시 여러 제약사가 참여 의사를 밝혔지만, 신약 개발의 복잡성과 기술적 난이도를 고려해 경쟁이 아닌 협력 모델을 택했다.
그 결과, 이스라엘 혁신청을 중심으로 빅파마 4곳, AWS, 벤처캐피털(VC) 등이 연합한 민관 협력체가 구성됐다. 이 협력체가 2021년 공식 출범한 아이온랩스다. 참여 업체들의 기술과 자본, 데이터를 결합해 신약개발의 구조적 한계를 해결하는 게 목표다.
길 대표는 "테바는 대표 신약인 다발성경화증 치료제 '코팍손(Copaxone)' 이후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찾기 위해 AI·머신러닝·계산생물학·계산화학 등 첨단 기술을 도입했지만, 내부 역량이 부족했다"며 "이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글로벌 제약사들과 협력하는 혁신 모델인 아이온랩스를 설립했다"고 설명했다.
아이온랩스는 '문제 중심'과 '기술 중심' 두 트랙으로 스타트업을 운영한다. 문제 중심 트랙의 대표 사례는 드노브AI(DenovAI)다. 이 회사는 'AI로 자연계에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항체를 설계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서 출발했다. 기존 단백질을 참고하지 않고 처음부터 완전히 새로운 단백질을 만들어내는 '드노보(denovo)' 기술이 핵심이다.
길 대표는 "약 90%의 질병은 기존 항체로는 치료할 수 없다"며 "이 문제를 전 세계 연구자들에게 제시한 결과 유럽분자생물학연구소(EMBL)의 기술이 선정돼, 수석 과학자인 카시프 사딕(Kashif Sadik) 박사를 중심으로 드노브AI가 설립됐다"고 말했다. 드노브AI는 3년 안에 첫 임상시험 진입을 목표로 하고 있다.
기술 중심 트랙의 대표 사례는 캐시디 바이오(Cassidy Bio)다. 대규모 언어모델(LLM)을 활용해 크리스퍼(CRISPR) 유전자가위의 가이드 리보핵산(RNA)을 설계한다. 가이드 RNA는 유전자 치료에서 정확도와 안전성을 좌우하는 핵심 요소다.
크리스퍼 유전자가위는 실제 가위가 아니라 원하는 유전자를 자르는 효소 복합체이다. 가이드 RNA가 잘라야 하는 디옥시리보핵신(DNA) 부분을 인식해 붙잡으면 캐스9 단백질이 DNA와 결합하면서 자른다. 대규모언어모델은 챗GPT처럼 방대한 양의 문장 데이터를 학습해 언어를 이해하고 사용자가 원하는 콘텐츠를 생성하는 AI 기술이다. 캐시디 바이오는 AI로 최적의 가이드 RNA를 설계하겠다는 것이다.
최근에는 한국 기업과도 협력 중이다. 지난 8월부터 국내 원료의약품 제조기업인 동방에프티엘(FTL)과 AI 신약개발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동방FTL이 신약 표적이 될 단백질 후보물질을 제공하면, 아이온랩스 스타트업인 프로핏(Prophet)이 AI로 결합 가능한 소분자 단백질을 선별하는 방식이다. 현재 한국-이스라엘 공동 펀드의 첫 시범 과제로 신청해둔 상태다.
길 대표는 "동방FTL처럼 단백질 항체 기술은 있지만 AI 역량이 필요한 기업과 협력할 수 있다"며 "이번 방한에서는 한국 기업과 투자자들과 미팅이 예정돼 있어 협력을 더 확대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 AI가 설계한 신약 후보물질 60여 가지가 임상시험 단계에 있지만, 아직 미국 식품의약국(FDA)이 승인한 사례는 없다. 초기 AI 신약개발 붐이 한 차례 지나간 뒤, 투자 열기도 식은 상황이다.
길 대표는 "이제는 지속 가능한 성장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며 "FDA 승인을 받는 AI 신약이 한두 사례만 나와도 산업 판도가 완전히 달라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는 "FDA도 지난해 'AI 기반 항체 발굴 수행 방식'을 증명하라고 공지하며 변화를 촉진하고 있다"며 "첫 승인 사례가 나오면 전 세계가 다시 주목하고, 홍수처럼 투자와 개발이 이어질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