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과학 연구의 패러다임이 '컴퓨터 속 실험(인실리코·in silico)'으로 옮겨갈 수밖에 없다는 걸 직감하고 창업을 결심했습니다."
김해진 엔솔바이오사이언스 대표는 IT(정보기술)를 바이오 산업에 적용하려고 2001년 엔솔바이오사이언스(이하 엔솔바이오)를 설립했다. 김 대표는 1983년부터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에서 17년간 활동한 IT 연구자이다.
김 대표는 2006년부터 2017년까지 충남대 생명과학부에서 겸임교수로 생물정보학을 가르쳤다. 생물정보학은 생물학 정보를 컴퓨터로 분석하는 학문이다. 생물학과 컴퓨터과학이 융합된 것이다.
그는 컴퓨터를 기반으로 신약 후보 물질 발굴 플랫폼을 구축에 나섰다. 김 대표는 "막대한 비용과 시간이 투입되는 전통적 신약 개발 방식 대신, 정보 기반 접근법을 도입해 성공 가능성을 높이는 것이 목표였다"고 말했다.
그 첫 결실이 엔솔바이오의 신약 후보 물질 발굴 플랫폼인 KISDD(Knowledge-based In Silico Drug Discovery)이다. 이후 KISDD 플랫폼과 펩타이드 발굴 시스템인 EPDS(Ensol Peptide Discovery System)를 통합했다.
김 대표는 "대규모 언어 모델(LLM) 기술까지 접목한 AI(인공지능) 신약 발굴 시스템인 ESAIDD(Ensol AI Drug Discovery)도 완성 단계에 있다"고 말했다. 대규모 언어 모델은 챗GPT처럼 방대한 양의 문장 데이터를 학습해 언어를 이해하고 사용자가 원하는 콘텐츠를 생성하는 AI 기술이다.
김 대표는 회사의 핵심 기술로 단백질 간 상호작용을 조절하는 짧은 펩타이드를 꼽았다. 펩타이드는 단백질의 구성 단위이다. 김 대표는 "짧은 펩타이드는 단백질들이 잘못 결합되지 않도록 조절해 질병을 근본적으로 치료한다"며 "이 기술을 통해 항체나 저분자 화합물로는 개발이 어려웠던 질병에도 접근할 수 있고, 독성이나 부작용 문제를 최소화하면서 효능이 뛰어난 신약 후보 물질을 발굴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엔솔바이오는 이미 여러 신약 후보물질을 도출해 개발 중이다. 미국 스파인바이오파마(Spine Biopharma)에 기술을 이전해 개발 중인 퇴행성 디스크 치료 후보물질 'P2K'가 대표적이다.
스파인바이오파마는 미국에서 P2K에 대한 임상 3상 시험을 마쳤다. 안전성과 효능이 확인됐지만, 비교 대상인 위약(가짜약) 투여군에서도 치료 효과가 나타나 통계적 유의성은 확보하지 못했다.
김 대표는 "그래도 임상적 유의미성이 충분히 입증된 결과"라며 "스파인바이오파마는 곧 임상시험 보고서를 제출하고 식품의약국(FDA)의 가속 승인을 받을 수 있도록 협의에 들어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그는 "빠르면 2026년 하반기, 늦어도 2027년 상반기 승인 가능성을 기대하고 있다"고 했다.
김 대표는 "스파인바이오파마와 퇴행성 디스크 질환 외에도 다른 근골격계 질환, 섬유증 등 3개 질환으로 P2K의 적응증을 확대하는 계약을 체결하는 성과도 있었다"며 "확장 가능성이 크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해당 계약 규모는 선급금 75억원을 포함해 고정 기술료가 총 2154억원이다.
엔솔바이오는 알츠하이머병, 골관절염, 비만 등 다양한 난치 질환 치료 후보 물질도 개발 중이다. 알츠하이머병 치료 후보물질인 M1K는 당독소라고 불리는 최종당화산물(AGE)가 당독소 수용체(RAGE)와 결합하지 못하게 하는 펩타이드 약물이다. 김 대표는 동물실험에서 인지 기능을 정상으로 회복시키는 효능을 확인해 현재 임상 1·2a 진입을 준비 중이라고 했다.
경구용 비만 치료 후보물질 H1K는 위고비와 같은 글루카곤 유사 펩타이드(GLP)-1 약물과 병용하면 요요현상(체중 증가)을 억제하고 대사 기능 개선 효과를 확인한 물질이라고 소개했다. 골관절염 치료 후보물질 E1K는 통증 완화와 연골 재생을 동시에 구현한다고 설명했다.
김 대표는 "E1K, H1K, M1K 등 주요 파이프라인 모두 글로벌 제약사와 협의가 진행 중"이라며 "내년 목표는 P2K의 FDA 가속 승인 획득과 E1K의 임상시험 진입, 그리고 최소 2건의 추가 글로벌 기술 이전 계약 체결"이라고 밝혔다.
엔솔바이오는 2018년 9월 코넥스에 상장됐는데, 코스닥 이전 상장을 추진할 계획이다. 김 대표는 "올해가 R&D 도약의 해라면, 내년은 성과를 사업화하는 한 해가 될 것"이라며 "코스닥 이전 상장을 통해 글로벌 시장에서 혁신 신약 개발 기업으로 도약하겠다"고 말했다.
앞서 최대 주주 변화도 있었다. 바이오기업 알테오젠(196170) 초기 투자자로 유명한 형인우 스마트앤그로스 대표가 지난 6월 엔솔바이오사이언스의 최대 주주가 됐다. 앞서 형 대표는 엔솔바이오사이언스 지분 추가 확보는 단순 투자 목적으로, 경영에 참여할 계획이 없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