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는 수천 년 동안 병을 고치기 위해 자연의 힘을 빌려왔다. 항생제 페니실린과 항암제 탁솔, 콜레스테롤을 낮추는 스타틴, 다발성 경화증 치료제 핑골리모드 등 의약품 상당수가 식물과 미생물 등 '천연물(Natural Products·NP)'에서 비롯됐다.
천연물은 인공적으로 합성한 화학물질보다 구조가 훨씬 복잡하다. 탄소와 산소 원자가 많고 질소나 염소는 상대적으로 적다. 반면 물에 잘 녹으면서도 단단한 구조를 지녀, 기존 합성약으로는 공략하기 어려운 단백질 간 상호작용 같은 영역에서도 정교한 맞춤형 신약 개발이 가능하다. 실제로 최근 20년간 승인된 신약의 분자 구조가 과거보다 커지고 복잡해진 것은 그만큼 천연물에서 얻은 아이디어가 많다는 뜻이다.
영국의 시장조사기관 테크나비오(Technavio)에 따르면 천연물 의약품 세계 시장 규모는 2023년 434억5000만달러(한화 약 61조9400억원) 규모의 시장을 형성했다. 앞으로 연 평균 8.2%로 성장해 2028년에는 643억8000만달러(91조7800억원)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미국, 유럽, 중국이 천연물 신약 개발 주도
천연물 연구는 오랫동안 쉽지 않은 분야였다. 한 추출물 안에 수백~수천 가지 성분이 섞여 있어 유효 성분을 찾아내는 데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들었다. 화학 구조가 워낙 정교해 비슷한 물질을 합성하거나 작용 원리를 규명하는 데도 한계가 있었다.
무엇보다 자연에서 얻은 물질은 특허 보호가 어렵고, 생물 자원의 원산국과 이익을 나누도록 한 국제 규범 '나고야 의정서'도 상용화를 어렵게 했다.
이제 상황이 달라지고 있다. 유전체 탐색(Genome Mining) 기술로 미생물과 해양생물의 DNA 속에서 천연물 합성 유전자를 찾아내고 있다. 합성생물학은 천연물 합성 유전자를 미생물에 넣고 최적화해 자연보다 더 효율적으로 생산할 길을 열었다.
AI(인공지능)와 자동화 배양 기술을 이용하면 발효 과정의 온도, 영양, 산도(pH) 등을 실시간으로 조정해 생산 효율을 높일 수 있고, 메타볼로믹스(대사체 분석) 기술로 추출물 속 성분을 한꺼번에 분석해 유효 성분을 신속히 찾아낼 수도 있다.
미국과 유럽은 정부 주도로 천연물 신약을 꾸준히 육성하고 있다. 대마 유래 성분으로 만든 다발성 경화증 치료제 '사티벡스', 뇌전증 치료제 '에피디올렉스', 자작나무 껍질에서 추출한 수포성 표피박리증 치료제 '필수베즈'가 그 결과물이다. 중국은 약용식물 자원을 앞세워 아시아를 넘어 세계 최대 단일 시장으로 성장했다.
한국의 천연물 신약 산업은 2000년 '천연물신약 연구개발 촉진법' 제정으로 본격적인 성장기를 맞았다. 2001년 1호 신약 '조인스정'을 시작으로 '스티렌정', '시네츄라시럽', '모티리톤' 등이 잇따라 개발됐지만, 2015년 감사원 지적 이후 정부 지원이 중단되면서 한동안 침체기를 겪었다. 약사법에서 '천연물 신약' 용어가 삭제된 것도 제도적 기반을 약화시켰다.
최근 새 정부가 연구개발 투자 확대와 약가 보상 제도 개편을 약속하면서 천연물 산업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정부와 산업계, 연구계 모두 재도약의 발판을 모색하는 가운데, 한국 천연물 산업의 방향성을 모색할 자리가 마련됐다.
◇전 세계 천연물 연구자 집결, 대중 강연도
오는 22일부터 24일까지 강릉 세인트존스호텔에서 '제1회 강릉 천연물 바이오 국제 콘퍼런스'가 열린다.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과 강릉시, 조선비즈가 공동 주최하는 이번 행사는 천연물 바이오 산업의 최신 연구 동향과 기술 발전 방향을 공유하고, 연구자와 시민이 함께 소통하는 장으로 기획됐다.
개막식 첫날 기조연단에는 남아프리카공화국 의학연구위원회(SAMRC) 산하 허벌드럭연구소(Herbal Drugs Research Unit)의 알바로 빌리욘(Alvaro Viljoen) 교수가 선다. 빌리욘 교수는 식물화학적 탐색과 약리활성 연구 분야에서 320편이 넘는 국제 학술논문을 발표하며, 100명에 이르는 대학원생을 지도해온 세계적 석학이다. 아프리카 토착 약용식물의 산업화에 기여한 그는 이번 강연에서 '남아프리카 약물식물학의 30년—발견, 개발, 그리고 성찰'을 주제로, 천연물 연구의 세계적 흐름 속에서 한국의 도전 방향을 조망할 예정이다.
23~24일에는 해외 석학과 국내 연구자가 참여하는 심화 콘퍼런스와 아슬라 심포지엄이 이어지며, 천연물 바이오의 최신 연구성과와 산업적 활용 가능성이 논의된다. 23일에는 일반 시민을 위한 대중 콘퍼런스도 열린다. 유투브 채널 안될과학의 과학 커뮤니케이터인 '약'이 대중 강연을 한다. 약은 제약 회사 출신이자 약학 박사인 이상곤씨이다.
행사 기간 동안 천연물 바이오 관련 전시와 체험 부스도 운영된다. 연구기관과 대학, 기업이 보유한 기술과 연구 성과를 소개하고, 3D(입체) 푸드 프린터 시연과 미생물 현미경 관찰, 커피 체험 등 시민이 직접 참여할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이 마련된다.
■제1회 강릉 천연물 바이오 국제 콘퍼런스
△일시: 2025년 10월 22일(수)~24일(금)
△장소: 강릉 세인트존스호텔 4층
△주최: 강릉시, 강릉관광개발공사,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강릉분원 천연물연구소, 한국관광공사, 조선비즈
△접수·문의: 070-5142-0540, Diana@withnnp.com
△전시 부스 관련 문의: 02-724-6064, pkb@chosunbiz.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