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反)백신론자로 알려진 로버트 케네디 주니어 미국 보건부 장관이 메신저리보핵산(mRNA) 백신 개발 지원을 잇따라 중단하자, 과학자들과 행정부 전현직 고위직들이 강하게 반발했다. 백신 지원 중단은 단순한 보건 정책 차원을 넘어 산업 경쟁력과 국가 안보까지 위협한다는 지적이다.
8일 뉴욕타임즈를 비롯한 외신에 따르면, 케네디 장관의 mRNA 백신 개발 지원 중단에 대해 전문가들의 반발이 거세지고 있다. 앞서 케네디 장관은 지난 5일(현지 시각) mRNA 백신 개발을 위한 5억달러(한화 7000억 원) 규모의 정부 보조금 계약을 취소했다.
◇조류인플루엔자 mRNA 백신 개발도 중단
mRNA는 백신 개발의 패러다임을 바꿨다. 이전엔 독성을 없앤 바이러스나 일부 단백질을 주사해 면역반응을 유도했다면, mRNA백신은 유전정보를 전달해 인체가 직접 바이러스 단백질을 합성하고 그에 맞서는 항체를 생산하도록 하는 방식이다.
mRNA 백신은 유전 정보만 있으면 바로 합성할 수 있어 변이에도 신속 대응할 수 있다. 바이러스를 배양하고 정제할 필요가 없어 백신 생산과 공급 시간도 크게 줄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유행기에 1년도 안 돼 백신이 보급된 것도 그 덕분이다.
그러나 케네디 장관은 mRNA 백신의 이런 장점과 공로를 부인하고 안전성과 효과에 의문을 제기하며 "역사상 가장 위험한 백신"이라고 비판해왔다. 그는 mRNA 지원 취소를 발표한 날 자신의 소셜미디어(SNS)에 "mRNA 백신은 코로나19와 인플루엔자(독감) 같은 호흡기 질환을 예방하지 못하며, 바이러스의 단일 변이만으로도 백신이 무효화된다"며 "팬데믹(감염병 대유행)에서 봤듯, mRNA 백신은 상기도를 감염시키는 바이러스를 잘 막지 못한다"고 썼다.
케네디 장관의 mRNA 백신 지원 중단 결정은 당장 보건부 산하 생물의약품첨단연구개발국(BARDA)의 22개 프로젝트에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BARDA는 H5N1형 고병원성 조류 인플루엔자 팬데믹에 대비하고 있다. 그 차원에서 지난 5월 모더나와 6억달러(8300억 원) 규모의 mRNA 백신 개발 계약을 맺었지만 이번에 취소됐다.
보건부는 mRNA 대신 열이나 자외선, 약물로 죽인 바이러스를 이용하는 백신 개발을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오랫동안 사용해 검증된 방식이지만, 대규모 바이러스 배양이 필수여서 시간이 오래 걸린다. 팬데믹이나 바이오 테러 발생 시 백신 공급이 수개월 이상 지연될 수 있으며, 어린이 접종 시 부작용으로 활용이 제한될 가능성도 있다.
◇과학계, 행정부 전문가들 "국가 안보 위협"
백신 전문가들은 이번 결정에 대해 "무책임하다"고 비판했다. 풍진·로타바이러스 백신을 개발한 스탠리 플로트킨(Stanley Plotkin) 펜실베이니아대 명예교수는 "mRNA 기술은 신속 대응에 최적화돼 즉각적이고 강력한 면역을 제공한다"고 말했다.
제니퍼 누초(Jennifer Nuzzo) 브라운대 팬데믹센터장도 "만약 mRNA 백신이 없었다면 코로나19 사망자가 훨씬 더 많았을 것"이라며 "부정확한 성명으로 모든 백신에 대한 의문을 조장하려는 케네디 장관의 목표가 여실히 드러났다"고 비판했다.
미국 행정부의 전·현직 고위 관계자들도 mRNA 백신을 버리는 것은 국가 안보에도 위협이 된다는 경고했다.
크리스 미킨스(Chris Meekins) BRADA 팬데믹 대비 담당 차관보는 "BARDA의 mRNA 연구 중단이 국가 안보 취약점을 초래했다"며 "새로운 생물학적 방어 능력을 개발하는 속도는 국가 안보 자산"이라고 꼬집었다.
외교 전문 싱크탱크인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의 스티븐 모리슨(Stephen Morrison) 글로벌 보건정책 국장은 "생물학적 위협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스스로 무장을 해제하는 것은 미국인을 위험에 빠뜨리는 일"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mRNA 백신 기술에도 한계가 있지만, 팬데믹 위협에 대응하려면 가능한 한 다양한 백신 기술을 확보해야 한다고 했다.
폴 프리드리히스(Paul Friedrichs) 전 백악관 팬데믹 정책실장은 "여러 선택지를 갖고 있어야 위기에 유연히 대응할 수 있다"고 했다. 돈 오코넬(Dawn O'Connell) 전 보건부 차관보는 "미국이 혁신과 개발 투자에서 손을 떼면, 기업과의 관계는 끊기고 전 세계 백신 개발 속도도 떨어진다"고 경고했다.
스테파니 프사키(Stephanie Psaki) 전 백악관 글로벌 보건안보 조정관은 "가장 신속히 대량 생산할 수 있는 도구를 버리는 것은 충격적인 결정"이라며 "향후 3년 반 안에 새로운 위협이 발생하면, 케네디 장관은 이번 결정을 후회할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