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미국에서 정자 운동을 억제하는 새로운 방식의 남성 피임약이 처음으로 사람을 대상으로 한 임상에서 안전성을 입증해 상용화 기대가 커지고 있다./unsplash

피임은 오롯이 여성의 몫이었다. 20가지 넘게 피임법이 개발됐지만 남성이 할 수 있는 방법은 콘돔과 정관수술밖에 없었다. 앞으로 사정이 달라질 전망이다. 미국에서 정자 운동을 억제하는 새로운 방식의 남성 피임약이 처음으로 임상시험에서 안전성을 입증해 상용화 가능성이 커졌다.

미국 바이오 기업 유어초이스 테라퓨틱스(YourChoice Therapeutics)는 비호르몬 경구 피임약 'YCT-529'의 임상 1상 시험에서 안전성을 학인했다고 국제 학술지 커뮤니케이션즈 메디신(Communications Medicine)에 22일(현지 시각) 발표했다. YCT-529는 정자 생성을 유도하는 비타민 A 대사산물이 고환 수용체에 결합하는 것을 차단해, 정자 생성 과정을 막는 비호르몬제다.

지금까지 남성 피임약들이 여럿 개발됐지만 대부분 여성 피임약처럼 성호르몬을 조절해 정자 생성을 막는 방식이었다. 그러다 보니 성욕 감퇴니 우울감 등 부작용 문제가 커 성공하지 못했다. 반면 이번 신약은 호르몬이 아니어서 부작용이 적고 복용을 중단하면 빨리 생식 기능을 회복할 수 있다고 회사는 밝혔다.

◇정자 생성 차단, 호르몬제 부작용 없어

이번 임상시험은 정자 수를 줄이는 피임 효과보다, 약물의 안전성과 체내 흡수(생체이용률) 여부를 확인하는 게 목적이었다. 스테파니 페이지(Stephanie Page) 워싱턴대 의대 내분비학 교수는 "그동안은 호르몬 기반 피임제에만 집중돼 있었던 만큼, 비호르몬 방식의 피임제가 사람에게 안전하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진전"이라고 평가했다.

임상시험에는 정관수술을 받아 이미 불임 상태인 32~59세 건강한 성인 남성 16명이 참여했다. 참가자들을 두 그룹으로 나눠 YCT-529를 서로 다른 용량으로 두 차례 복용했다. 한 그룹은 10㎎에서 30㎎으로, 다른 그룹은 90㎎에서 180㎎으로 복용량을 늘렸으며, 일부는 고지방·고칼로리 식사 후 30㎎을 추가 복용해 음식이 약물 흡수에 미치는 영향도 함께 살폈다.

시험 결과, 참가자들은 약물이 체내에서 빠르게 분해되지 않고 혈중 농도가 유지됐으며, 평균 2~3일에 걸쳐 반감기에 도달한 것으로 나타났다. 유어초이스의 나드야 마노베츠(Nadja Mannowetz) 최고과학책임자(CSO)는 "하루 한 알 복용으로도 충분할 수 있다고 판단된다"며 "최종 시판될 경우 복용량은 180㎎ 수준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참가자들에서 별다른 부작용도 나타나지 않았다. 회사는 특히 호르몬계를 건드리지 않는 방식인 만큼 성기능이나 성욕, 기분 변화 등 기존 남성 호르몬 피임제에서 우려됐던 부작용 위험이 줄어든다고 설명했다. 다만 페이지 교수는 "모든 약물에는 부작용이 있을 수 있으며, 이번 임상시험은 규모가 작기 때문에 향후 대규모 임상시험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YCT-529처럼 정자 생산 자체를 차단하는 방식의 남성 피임약은 복용 후 약 3개월이 지나야 효과가 나타난다. 이는 정자가 성숙하는 데 걸리는 시간 때문이다. 복용을 중단하면 약 3개월 뒤 다시 정자 생산이 재개된다.

앞서 지난 3월 미국 미네소타대 약대, 컬럼비아대, 유어초이스 공동 연구진이 진행한 동물실험에서는 YCT-529의 피임 효과도 확인됐다. 수컷 생쥐에 YCT-529를 투여했을 때 4주 만에 임신을 99% 예방할 수 있었고, 수컷 영장류에 투약했을 때는 2주 만에 정자 수가 크게 감소했다.

두 동물 모델 모두 약물 복용을 중단한 뒤 생식 기능이 완전히 회복됐다. 생쥐는 6주, 영장류는 10~15주 내 정자 수가 정상 수준으로 돌아왔다. 약물 관련 부작용도 관찰되지 않았다.

미국 바이오 기업 콘트랄린은 지난 4월 정자 이동을 막는 피임 기구 아담(adam)의 임상 1상 시험을 발표했다./Contraline

◇정자 이동 막는 젤 피임약도 개발 중

YCT-529 외에 호르몬을 조절하는 방식의 남성 피임약 후보물질도 개발되고 있다. 미국 국립아동보건인간발달연구소(NICHD)가 개발 중인 팔에 바르는 호르몬 피임 젤 'NES/T'이 대표적이다. 여성 호르몬인 프로게스틴 성분의 네스토론과 남성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이 피부로 흡수돼 뇌를 통해 정자 생산을 억제하는 방식이다. 최근 임상 2상 시험을 마치고 3상을 앞두고 있다.

미국 바이오 기업 콘트랄린(Contraline)은 콘돔과 정관 수술을 대체할 수 있는 정관 주입형 피임 물질 '아담(Adam)'의 임상 1상 시험을 진행 중이다. 아담은 수용성 하이드로겔을 정관에 주입해 정자의 이동을 가로막는 방식이다. 하이드로겔은 묵이나 젤리처럼 물을 많이 함유해 말랑말랑한 물질이다. 이밖에 호르몬 기반 먹는 피임약도 개발되고 있다.

남성 피임약에 대한 수요도 높다. 2023년 발표된 연구에 따르면 미국과 캐나다의 남성 2000여 명 중 약 75%가 새로운 피임법을 시도할 의향이 있다고 답했다. 앞서 2019년 조사에서는 임신을 원하지 않는 18~49세 남성의 약 절반이 "매우 관심 있다"고 응답했다.

페이지 교수는 "남성들도 더 많은 피임 선택지를 원하고 있고, 적극적으로 참여할 준비가 돼 있다"며 "이러한 시도들은 부부와 개인 모두에게 더 큰 재생산 자율권을 부여할 것"이라고 말했다.

참고 자료

Communications Medicine(2025), DOI: https://doi.org/10.1038/s43856-025-01004-4

Communications Medicine(2025), DOI:

https://doi.org/10.1038/s43856-025-0075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