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3일(현지 시각) 시장 조사 기관 프리시던스 리서치(Precedence Research)는 글로벌 의료기기 시장 규모는 지난해 6404억 5000만달러(한화 약 875조원)에서 2034년까지 약 1조 1469억 5000만달러(1567조원) 규모로 커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연평균 성장율은 6%이다.
전 세계 의료기기 시장이 고령화와 만성질환 환자의 증가, 기술 발전 등에 힘입어 꾸준한 성장세를 이어가고 있다. 기업들은 의료기기에 대한 연구개발(R&D) 투자를 늘리고, 미국 식품의약국(FDA) 같은 규제 당국도 승인 절차를 간소화해 시장 성장을 지원하고 있다.
하지만 의료기기 시장은 안팎에서 새로운 도전을 맞고 있다. 미국 트럼프 행정부 2기 출범 이후 관세 정책과 무역 규제 등 통상 리스크가 의료기기 산업 성장을 저해할 수 있는 문제로 부각되고 있다. 안에서는 데이터 보안 문제가 의료기기 시장 성장을 저해할 수 있는 요인으로 꼽힌다.
◇글로벌 의료기기 기업들, 1분기 깜짝 실적
글로벌 의료기기 기업들은 시장 성장에 발맞춰 예상치를 웃도는 깜짝 실적을 내고 있다.
수술 로봇에서 세계 점유율 1위인 미국 인튜이티브서지컬은 1분기 매출액이 전년 같은 기간보다 19.2% 증가한 22억5000만달러를, 주당순이익(EPS)은 전년동기 대비 4.6% 늘어 1.81달러를 기록했다. 이는 시장 예상치를 상회한 어닝 서프라이즈(깜짝 실적)다.
영상 진단 기기 업체인 미국 GE헬스케어의 1분기 매출액은 48억달러(6조 5520억원)로 전년 동기 대비 4% 늘었다. 회사는 자체 주문도 전년보다 10% 늘었다고 밝혔다. 이 회사의 주력 제품은 초음파, 자기공명영상(MRI), 컴퓨터단층촬영(CT), 양전자방출단층촬영(PET) 장비들이다.
미국 의료기기 기업 메드트로닉은 작년 5월부터 올해 4월 말까지 실적을 집계한 회계연도 기준 매출액이 전년보다 3.6% 증가한 335억달러(45조7100억원)를, 영업이익은 16% 늘어 60억 달러(8조1876억원)를 기록했다고 21일(현지 시각) 밝혔다.
올해 2~4월(회계 기준 4분기) 매출액은 89억달러(12조원)으로 전년 대비 3.9% 증가하고, 조정 영업이익은 25억달러(3조원)로 7.6% 늘었다. 각 사업부문별로 심혈관 사업부 매출은 같은 기간 6.6%, 신경과학 부문은 2.9%, 의료 수술 부문은 0.6%, 당뇨 사업부(Diabetes)는 10.3% 증가했다.
이 회사는 심혈관·신경·당뇨 질환 영역에서 진단, 처치, 수술에 쓰는 의료장비를 세계 시장에 공급하고 있다. 심장박동기, 심혈관 스텐트, 심폐 수술용 혈관 튜브·카테터, 신경계 질환 치료용 뇌심부 자극기, 인슐린 펌프 등이 대표적이다.
글로벌 시장을 선도하는 의료기기 기업들은 지속적인 R&D 투자로 품질과 기술을 계속 향상시키면서 성장을 이어가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GE헬스케어는 지난해 AI 기술을 보유한 영국 인텔리전트 울트라사운드 그룹을 전면 인수했다. 메드트로닉은 로봇수술 시스템 휴고를 유럽에 이어 한국에 선보였다. 미국에선 허가 절차를 밟고 있다.
◇국내사들도 세계 시장 개척에 나서
국내 의료기기 기업들도 국산화에 이어 제품 품질과 가격 경쟁력을 앞세워 해외 시장 개척에 열을 올리고 있다. 그 덕에 무역수지도 흑자 흐름을 이어가고 있다.
식품의약품안전처에 따르면, 2023년 한국 의료기기 산업 무역수지는 5878억원 흑자를 기록하며, 2020년 이후 4년 연속 흑자를 달성했다. 2023년 한국 의료기기 시장 규모는 10조 7270억원이다. 코로나19 엔데믹(풍토병화) 전환에 따른 진단 키트사들의 사업 부진의 여파로 전년보다 9.7% 줄었으나 2019년과 비교하면 37.5% 성장했다.
국내 의료기기 기업 중 매출 규모 1위는 치과용 임플란트·진단기기 회사 오스템임플란트다. 이 회사의 지난해 연결 기준 매출액은 전년보다 8.9% 증가한 1조 3155억원이다. 국내뿐 아니라 중국, 미국, 유럽, 동남아시아 등으로 시장을 개척하고, 생산설비와 R&D 투자로 경쟁력을 강화한 결과라고 회사는 설명했다.
영상진단회사 삼성메디슨의 지난해 매출액은 5712억원이다. 2020년 매출 3084억원을 시작으로 매년 두자릿 수 성장세를 보였다. 추세가 이어지면 올해 6000억원 달성도 기대된다.
코로나19 대유행이 지나고 타격을 입었던 진단키트 업체의 실적도 점차 회복세를 보이고 있다. 에스디바이오센서(137310)의 지난해 연결 기준 매출액은 전년보다 5.9% 늘어 6946억원을, 씨젠(096530)의 작년 매출은 전년보다 약 12% 늘어 4143억원을 기록했다. 두 회사 모두 코로나 진단키트 사업 의존도를 줄이고자 제품군을 확대하고, 시장을 넓히는 데 주력했다.
에스디바이오센서(137310)는 2021년 말부터 해외 진단기기 유통사·제조사를 줄줄이 인수했다. 세계 체외진단 시장에 진출 속도를 내기 위한 전략이었다. 2022년엔 국내 사모펀드 운용사 SJL파트너스와 함께 미국의 체외진단 기업 메리디안 바이오사이언스(Meridian Bioscience)를 약 2조원에 인수·합병(M&A)했다. 그전엔 독일 베스트비온(Bestbion), 이탈리아 리랩(Relab), 브라질의 에코 디아그노스티카(Eco Diagnostica)를 인수했다.
씨젠은 지난해 전문경영인 체제로 돌입하고, 결핵·호흡기, 자궁경부암 등 비(非) 코로나19 분야 진단 제품군을 강화했다. 디지털 강화 목적으로 지난해 소프트웨어 회사 브렉스와 펜타웍스도 인수했다.
최근엔 피부 미용 의료기기 기업들의 성장세가 두드러졌다. 클래시스(214150)는 올해 1분기 매출액이 771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53% 늘었고, 영업이익은 388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46% 증가했다. 뷰티 브랜드 '메디큐브'를 보유하고 있는 에이피알(278470)은 올해 1분기 연결 기준 매출은 전년 같은 기간보다 79% 늘어 2660억원, 영업이익은 전년 같은 기간보다 97% 늘어 546억원을 기록했다.
◇미중 무역전쟁 중 관세 불확실성 남아
글로벌 의료기기 시장의 변수는 미국에서 시작된 관세 정책이다. 기업들은 글로벌 관세 변수에 예의주시하고 있다. 미국 의료기기 회사들은 수출로 성장해왔고, 제품에 들어가는 부품 상당수가 중국산이다. 게다가 각 회사의 제조 공장이 미국 밖 멕시코, 유럽 등에 있다. 이런 사업 구조 때문에 미국과 중국 간의 상호 관세, 부품 수입에 대한 관세 영향을 모두 받을 수 있는 상황이다.
지난달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모든 중국산 수입품에 145%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했고, 중국은 미국의 추가 관세에 대응해 보복 관세 125%를 부과하겠다고 했다. 미국 회사가 의료기기 반제품, 완제품을 중국으로 수출하면 중국에서 125% 관세가 부과되고, 중국에서 미국으로 부품을 수입하는 경우 미국에서 145% 관세가 붙는 식이다.
또 멕시코에서 제조된 제품은 미국 수입 시 관세가 부과되지 않지만, 일부 품목에 대해서는 25% 관세가 부과될 수 있다. 유럽공장에서 수입하는 경우 10%의 관세가 부과된다.
최근 미국과 중국이 양국의 상호 관세를 일시적으로 대폭 인하하기로 합의하면서 업계는 한시름 놓았다. 미국과 중국은 대중, 대미 관세를 각각 30%와 10%로 향후 90일간 낮추겠다고 지난 12일(현지 시각) 밝혔다.
박선영 미래에셋증권 연구위원은 "글로벌 관세 정책 등 거시환경 불확실성을 제외하면 인튜이티브서지컬 등 글로벌 의료기기 기업들의 펀더멘털은 견조하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안심하기에는 아직 이르다는 의견도 있다. 한 업계 관계자는 "1분기 실적의 경우 관세 영향 반영되지 않은 것인데, 관세 여파에 따라 실적도 추이도 바뀔 수 있어 세계 시장 상황을 지켜봐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