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 기술은 생명과학 연구 전반에 걸쳐 적용되고 있다. 특히 퇴행성 신경질환의 진단 정확도를 높이고 치료 전략을 정교화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환자 세포로 만든 줄기세포로 AI가 찾은 약물을 시뮬레이션(모의실험)하면 맞춤형 치료도 가능할 것으로 기대된다.
7일 서울 코엑스에서 열린 '골든 트라이앵글 생명과학 오픈 이노베이션' 포럼에서 한국과 영국, 일본 과학자들이 바이오, 디지털 기술을 활용해 얻은 최신 연구 성과를 소개했다. 이번 포럼은 바이오코리아 2025의 특별 세션으로 마련됐다.
먼저 이노우에 하루히사 일본 교토대 iPS 세포연구소(CiRA) 책임연구원은 근위축성 측삭경화증(ALS) 질병의 진단과 치료에 유도만능줄기세포(iPS세포)와 AI를 활용한 사례를 발표했다. 루게릭병이라고도 불리는 ALS는 온몸 근육이 천천히 마비되는 희소 질환으로, 근본적인 치료법이 아직 개발되지 않았다.
이노우에 책임연구원은 ALS 환자의 iPS세포를 이용해 치료 효과가 있는 약물 후보군을 찾는 AI인 'PM-HDE'를 소개했다. iPS세포는 다 자란 세포에 특정 유전자나 단백질, 또는 화학물질을 넣어 인체 모든 세포로 자랄 수 있는 배아줄기세포 상태로 역분화를 유도한 것이다.
AI인 PM-HDE는 열 확산 방정식을 기반으로 치료제로 적합한 화합물의 구조를 예측하고, 가능성 있는 약물 후보군을 순위화한다. 연구진은 ALS 환자의 iPS세포로 만든 신경세포에 AI가 설계한 1000여 화합물을 시험했다. 그 결과 신약 후보물질 29개를 선별했다. 해당 화합물은 세포 실험을 거쳐 제약사에서 약물로 개발 중이다.
ALS를 조기 진단하기 위한 딥러닝 알고리즘도 개발했다. 딥러닝은 인간의 신경 구조를 모방한 심층 기계학습 방법이다. 연구진은 ALS 환자에서 얻은 운동 신경세포의 데이터를 AI에 학습시키고, 나중에 신경세포의 분화 이미지를 분석해 ALS 발병 가능성을 예측할 수 있도록 했다. 이노우에 책임연구원은 "ALS 진단 보조 도구로서 사용할 수 있다"며 "향후 치료 전략을 개발하는 데에도 기여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노우에 책임연구원은 유전자 발현 데이터를 학습한 AI를 기반으로 산발성 ALS를 분류할 수 있는 혈액 기반 바이오 마커(생체지표)도 추려냈다. 산발성 ALS는 환경적 요인으로 발생하는 ALS로, 환자의 약 90%를 차지한다. 그는 "지금까지 한 내용은 ALS와 관련된 연구지만, 미래에는 새로운 데이터 세트를 적용해 다양한 질병에 대한 치료법을 개발하는 데에도 활용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케이 조 영국 킹스 칼리지 런던 의과대학 신경과학 교수는 AI를 활용해 알츠하이머병과 같은 퇴행성 신경질환을 진단하고 발병 과정을 밝힌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케이 조 교수 연구실은 2013년부터 AI 머신러닝(기계학습)을 활용해 왔다. 머신러닝은 사전에 프로그래밍하지 않고도 대용량 데이터를 학습하고 스스로 방법을 찾는 AI 기술이다.
AI가 퇴행성 신경질환 데이터를 학습한 결과, 환자의 시냅스가 크게 약화됐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시냅스는 한 신경세포에서 다른 신경세포로 신호를 전달하는 연결 지점이다. 또 시냅스 약화에는 타우 단백질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도 밝혔다.
이를 바탕으로 연구진은 AI를 활용해 타우 단백질에 결합하는 펩타이드 약물을 설계했다. 펩타이드는 단백질 조각이다. 케이 조 교수는 "AI는 타깃까지 안정하게 이동해 발현될 수 있는 펩타이드 구조를 제시했다"며 "적합한 펩타이드를 디자인하는 데 걸리는 시간을 아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 외에 AI에 1만 개 퇴행성 신경질환 관련 이미지를 학습시켜 신경세포의 퇴행이 점진적으로 일어난다는 사실도 확인했다. 케이 조 교수는 "AI는 훌륭한 도구지만, 생물학 검증이 꼭 필요하다"며 "뇌 피질 조직을 이용해 AI의 예측 결과를 검증하는 방법도 개발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한국과 일본, 영국이 한 팀으로 협력하면 더 좋은 결과를 낼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윤형진 서울대 의공학과 교수는 생성 AI 시대의 환자 중심 치료에 대해 발표했다. 윤 교수는 "환자 중심형 치료에는 소통과 파트너십, 건강 증진의 세 가지 요소가 있는데, 특히 양자 소통이 중요하다"며 "환자와 의사가 함께 논의해서 치료 옵션을 결정하는 것처럼 의사와 환자 사이에 올바른 정보가 잘 공유돼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를 위해 디지털 트윈 기술을 활용할 수 있다. 디지털 트윈은 현실 세계의 사물을 정확하게 반영하도록 설계된 시스템 또는 물체를 가상으로 표현한 것을 말한다. 이 기술을 활용한 시뮬레이션(모의실험)으로 특정 치료를 했을 때 어떤 결과가 있을지 예측하고, 예측 결과를 바탕으로 환자와 논의해 치료 방식을 결정할 수 있다.
윤 교수는 "이 과정에서 환자가 시뮬레이션 결과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도록 '헬스 리터러시(건강정보 문해력)'를 높이는 것이 중요하다"며 "생성 AI인 챗GPT와 인간 의사를 비교했을 때 챗GPT가 정보의 질이나 공감도 측면에서 높은 점수를 낸 것을 보아, 챗GPT와 같은 대규모 언어 모델이 헬스케어 판도를 바꿀 수 있다"고 했다.
인간의 언어를 이해하는 AI 머신러닝 방법인 대규모 언어 모델은 디지털 트윈 기술을 고도화하는 데에도 큰 역할을 할 수 있다. 윤 교수는 "환자에게서 데이터를 수집해 디지털 트윈에 활용하면 환자 맞춤형 데이터도 얻을 수 있다"며 "아직 갈 길이 멀지만 협력을 통해 달성할 수 있을 거라 본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