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넘게 이어진 한미약품(128940)그룹 창업자 일가 모녀와 형제간 경영권 분쟁이 모녀 측 '4인 연합'의 승리로 끝났다. 제약업계는 모녀와 손잡은 개인 최대 주주 신동국 한양정밀 회장과 라데팡스 파트너스의 승리라고 평가한다.
한미약품그룹은 지난 13일 이사회를 열고 창업자인 고(故) 임성기 회장의 차남 임종훈 대표이사가 대표이사직을 사임하고, 임 회장의 부인인 송영숙 한미약품그룹 회장을 신임 대표이사로 선임했다.
장남 임종윤 코리그룹 회장은 최근 한미사이언스 이사직에서 물러난 데 이어 한미그룹 자회사 북경한미약품유한공사(북경한미) 동사장(이사회 회장)에 선임됐다. 이로써 창업자 일가의 경영권 분쟁은 종식됐다.
한양정밀을 세운 신 회장은 임성기 회장의 절친한 고향 후배다. 과거 임 회장 권유로 2010년 주식 지분을 매입해 개인 최대 주주로 올라섰고, 이번 창업자 일가의 경영권 분쟁에서 해결사 역할을 했다.
'신약 개발 명가'라는 한미약품 창업자 임성기 선대 회장의 뜻을 이어가는 것도 사실상 신 회장의 손에 달려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송영숙 회장과 신동국 회장 등 4인 연합은 그룹 안정화와 주가 부양, 실적 성장에 주력할 것으로 보인다.
다만, 시장 일각에선 제조업을 해온 신 회장과 사모펀드회사 라데팡스가 전폭적으로 연구개발(R&D)에 투자하려는 의지가 있겠느냐는 의구심도 있다. 이에 대해 한미약품그룹은 "신, 회장, 라데팡스 등 4인 연합은 한미약품의 DNA이자 경쟁력의 핵심인 신약 개발에 대한 의지가 강하다"고 강조했다.
◇한양정밀 활용한 신동국 회장… 주가 회복 의지 강해
경영권을 쥔 4인 연합은 한미그룹 경영을 안정화하고, 경영권 분쟁으로 하락한 기업 주식 가치를 회복하겠다는 의지가 강하다.
익명을 요구한 한 투자업계 관계자는 "4인 연합이 경영권 분쟁 위험으로 흔들린 주가를 바로잡고, 파열음을 더는 만들지 않겠다는 의지가 강하다"며 "그동안 천명해 온 전문경영인 체제 확립도 변동 없이 추진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룹 안팎에선 한미약품그룹 경영에 '한양정밀'이 입김을 가할 수 있는 구조가 된 데 주목하고 있다. 신 회장은 경영권 분쟁에서 한양정밀을 적극 활용해 왔다.
한양정밀은 경기 김포에 기반을 둔 연 매출 800억원대의 중견기업으로, 신 회장이 지분 100%를 갖고 있다. 설립 초기엔 공동 창업자들과 주식을 나눠 갖고 있었지만 2011년 신 회장이 지분 전량을 사들였다.
신 회장은 지난해 모녀가 보유한 한미사이언스 주식 444만여주(지분율 6.5%)를 1644억원에 사들이며 지분율을 확대했다. 당시 한양정밀이 1000억원, 나머지 644억원을 신 회장 개인 돈으로 조달했다. 한양정밀의 경우 해당 자금을 공장 토지를 담보로 대출을 받아 충당했다. 이를 통해 모녀는 상속세 재원을 마련했고, 신 회장 측은 18.93%(한양정밀 보유 지분 3.95% 포함)로 한미사이언스 최대 주주가 됐다. 작년 12월에도 신 회장이 자금난을 겪어온 임종윤 코리그룹 회장·한미사이언스 전 사내이사 지분 5%를 매입했다.
◇머크식 전문경영인 체제 성공할까
경영권 분쟁을 끝낸 한미약품은 전문경영인 체제 확립과 경영 안정화가 주요 과제로 남아 있다. 다만 업계에서는 이해관계가 미묘하게 다른 4인 연합 아래 한미그룹과 자회사 사업이 한 방향으로 속도를 낼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도 있다.
이지수 다올투자증권 연구원은 "한미약품그룹의 경영권 분쟁으로 인한 악재는 해소됐다고 평가된다"면서 "다만, 앞으로 그룹·계열사 경영진이 조화를 이뤄 '원 유니온'이 돼야 하는데 사업 방향성이 통일될 수 있느냐가 관건"이라고 말했다.
현재로선 모녀와 치열하게 경영권 분쟁을 벌여온 형제가 한미사이언스 이사회와 한미약품의 주요 계열사인 북경한미에 각각 남는 구조다.
시장에선 이를 두고 경영상 다소 조화롭지 못한 그림이라는 평가가 있다. 제약업계 관계자는 "북경한미는 한미약품 매출에 대한 기여도가 큰 회사인데, 북경한미 경영권을 쥔 임종윤 회장이 다른 사업을 하겠다고 해버리면, 그룹이 추구하는 사업 방향과도 엇갈릴 수 있다"며 "최대 주주인 신동국 회장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고 말했다.
송영숙 한미그룹 회장이 일단 한미사이언스 신임 대표에 올랐으나, 조만간 전문경영인 선임이 이뤄질 전망이다. 앞서 신동국 회장은 언론 인터뷰에서 "한미약품은 지금처럼 박재현 대표로 가고, 한미사이언스도 임종훈 대표가 물러나고 전문경영인 체제로 가야 한다"고 밝힌 바 있다. 박재현 대표는 한미약품에서 30년 이상 일한 전문경영인으로, 4자 연합 지지를 받는 인물이다.
송 회장과 신 회장은 미국 제약사 머크(MSD)식 전문경영인 체제를 도입하겠다고 했다.
머크는 가족위원회·파트너위원회 등 2개 위원회를 운영하고 있다. 머크 가문의 일원과 외부 전문가로 구성된 가족위원회가 파트너위원회 구성원을 뽑고, 파트너위원회에서 머크의 최고경영진을 선임하는 구조다.
새 전문경영인이 선임되면 조직 개편과 함께 한미사이언스 1대 주주인 신동국 회장과 모녀·형제 간의 역할도 정리될 예정이다.
임직원의 결속력 강화도 시급한 문제다. 지주사 한미사이언스가 임직원을 동원해 한미약품의 재무회계, 인사, 전산 업무 등 경영활동의 정상적인 업무를 수행하지 못하도록 통제하는 등 지주사와 핵심 사업 회사가 갈등을 겪어왔고, 이 과정에서 한미약품이 한미사이언스를 상대로 고소장을 내기도 했다.
한미약품그룹은 오는 3월 정기 주주총회에서는 신규 이사 선임과 함께 앞으로 경영 체제에 대해 발표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