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업자 일가 모녀와 형제가 경영권 분쟁 중인 한미약품그룹이 대표이사 해임안 등을 두고 다시 표 대결을 벌였다. 사진은 12월 19일 서울시교통회관에서 열린 한미약품 임시주주총회장 모습. /연합뉴스

창업자 일가 모녀와 형제가 대립하며 1년 가까이 진행 중인 한미약품(128940)그룹 경영권 분쟁이 새 국면을 맞았다. 형제 연합에 균열이 감지된 가운데, 형제가 노린 한미약품 경영권을 지킨 모녀 측 4자 연합이 형제가 쥐고 있는 한미사이언스 경영권 장악에 다시 나설 전망이다.

19일 한미약품 임시 주주총회 안건으로 오른 박재현 한미약품 대표와 신동국 한미약품 이사(한양정밀 회장) 해임안이 부결됐다. 이는 창업자 일가 형제 측 한미사이언스가 제안한 안건인데, 형제의 계획이 좌초한 것이다.

시장과 업계는 주총 전후로 장남 임종윤 한미사이언스 이사의 행보에 주목하고 있다. 임 이사가 최근 송영숙 한미약품그룹 회장과 임주현 한미약품그룹 부회장 등 모녀에 대화를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달 그는 어머니 송영숙 회장과 전문경영인 박재현 한미약품 대표를 배임 혐의로 고발했는데, 돌연 화해 모드를 보인 것이다.

업계에 따르면, 임 이사는 분쟁을 일단락하는 조건으로 한미약품 자회사인 북경한미약품 경영권을 원하는 것으로 파악됐다. 임 이사의 개인회사인 코리그룹이 북경한미약품의 중국 의약품 유통을 담당하고 있다. 이에 차남 임종훈 한미사이언스 대표와 한목소리를 내던 형제 관계가 틀어진 것 아니냐는 해석도 나왔다. 다만, 현재로선 4자 연합과 임 이사 간 협상이 이뤄질지는 미지수다.

현재 가장 급하고 불안한 처지에 놓인 게 임 이사다. 애초 그의 계획은 지주사 한미사이언스 대표는 동생이, 핵심 회사 대표는 형이 맡는 그림이었는데 동생만 한미사이언스 대표직에 오른 상황이다.

상속세와 주식담보대출 무게도 창업자 일가 중 그가 가장 무겁다고 알려졌다. 최근 한미사이언스(008930) 주가는 3만원선이 무너졌다. 전날 종가는 3만200원이었다. 3만원은 오너일가 주식담보대출 계약에 마진콜(추가 담보 요구) 여부를 가르는 경계선으로 평가된다. 업계에 따르면 임종윤 이사가 지난달 28일과 이달 3일 각각 계약 기간이 만료된 한국증권금융과 미래에셋증권 주식담보대출 계약의 상환 자금을 마련하지 못하면서 반대매매를 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왼쪽부터) 임종윤 한미사이언스 이사와 임종훈 한미사이언스 대표가 3월 28일 경기도 화성시 라비돌호텔에서 개최된 한미사이언스 정기 주주총회가 끝나고 악수를 하고 있다. /허지윤 기자

앞서 임 이사는 한미약품 임시 주총 철회를 제안하기도 했다. 그는 지난 13일 한미약품 임시주총 안건에 대한 국민연금의 ‘반대’ 결정이 공개된 직후 “경영권 분쟁의 장기화를 방지하고 회사의 미래를 위해 대주주를 포함한 모든 주주와의 책임 있는 논의가 시급하다”면서 임시 주총을 철회하자는 제안을 담은 입장문을 언론에 배포했다가, 이를 다시 거둬들였다.

업계는 모녀 측 4자 연합이 한미사이언스 경영권 장악을 다시 시도할 것으로 보고 있다. 지난달 한미사이언스 임시 주총에서 4자 연합이 제안한 이사회 확대 방안이 무산돼 형제와 모녀 양측 이사진이 5대 5로 동률이다. 하지만 당시 개인 최대 주주 신동국 한양정밀 회장은 이사회 진입에 성공했다. 장녀 임주현 부회장의 이사회 진입은 상정 안건이 자동 폐기돼 실패했는데, 애초에 신 회장을 이사회에 먼저 입성시킬 것으로 예상됐다.

이에 따라 신 회장을 필두로 4자 연합이 다시 한미사이언스 이사회 재편과 임종훈 대표의 해임, 지주사의 전문경영인 체제 구축 등을 추진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더구나 4자 연합은 그동안 지분을 매입해 49% 가까이 의결권을 확보한 만큼, 내년 3월 열릴 한미사이언스 정기 주주총회에서 승산이 있다고 보고 있다.

앞서 차남 임종훈 대표가 상속세 마련과 주식담보대출 상환을 위해 지난달 15일 보유한 한미사이언스 주식 중 105만주를 장외거래로 해외 헤지펀드 운용사에 매각 처분하면서 임 대표의 한미사이언스 지분율이 9.27%에서 7.85%로 줄었다. 반면, 이 기간 모녀와 손을 잡은 사모펀드(PEF) 운용사 라데팡스파트너스는 해외 기관 투자자로부터 지분 1.39%를 사들이며 지분율이 5.09%로 늘었다. 이에 임 대표가 매각한 지분을 사들인 해외 운용사가 라데팡스에 지분을 되판 것으로 추정됐다.

다만, 임 대표가 한미사이언스 경영권을 쉽게 놓지 않을 전망이라 당분간 그룹 내 파열음이 계속 나올 것으로 보인다. 한미약품에 따르면 형제와 한미사이언스 측이 모친 송영숙 회장과 박재현 대표 등을 포함해 한미약품을 상대로 총 8건의 고소·고발을 진행했다. 이에 한미약품은 임 대표 측 한미사이언스가 한미약품의 결재·인사 시스템을 부당하게 통제해 업무를 방해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맞고소한 상황이다.

임종훈 한미사이언스 대표는 이날 임시 주총 직후 “주주 의견을 존중한다”면서도 “지주사 대표로서 그룹이 올바른 방향으로 가도록 리더십 발휘할 것”이라고 말했다.

박재현 한미약품 대표는 “그동안 임직원과 주주분들께 죄송한 마음이 컸다. 앞으로는 이런 소모적인 것보다 회사 발전을 위해 전력투구하고 싶다”고 말했다. 박 대표는 “가족 간 분쟁 속에서도 한미약품 실적은 잘 나왔고, 한미약품의 R&D 역량은 건재하다”며 “파이프라인을 지속적으로 강화하며 회사를 발전시키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