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제약사인 미국 일라이 릴리가 인공지능(AI) 파트너를 구했다. 대규모 데이터를 학습해 스스로 답을 찾는 머신 러닝(기계학습)으로 신약 후보물질을 발굴하는 미국 인시트로(Insitro)가 주인공이다. 당뇨·비만 치료제 마운자로(성분명 티르제파타이드)로 돌풍을 일으킨 일라이 릴리가 AI 기술을 활용하기 위해 이 회사와 손을 잡은 것이다. 두 회사의 목표는 대사이상 지방간(MASH) 치료제를 개발하는 것이다.
미국 스탠퍼드대 컴퓨터과학과 교수이자 인시트로 설립자인 대프니 콜러(Daphne Koller) 대표는 지난 16일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에서 조선비즈를 만나 “인시트로는 AI로 발견한 짧은 간섭 리보핵산(siRNA)으로 지방간 질환을 없앨 치료제를 개발하고 있다”고 밝혔다.
과학자들은 RNA가 DNA(디옥시리보핵산)의 유전정보를 복사해 단백질을 합성하는 데 그치지 않고, 가닥이 아주 짧은 형태일 때는 특정 유전자의 기능을 차단해 암과 같은 질병을 억제하는 효과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를 ‘RNA 간섭’이라고 한다. siRNA는 이런 역할을 하는 짧은 RNA를 인공으로 합성한 것이다.
두 회사는 대사이상 지방간 질환을 치료하는 siRNA를 개발하고 있다. siRNA는 간에 도달해야만 지방간을 치료할 수 있는데, 일라이 릴리가 보유한 아세틸갈락토사민(GaINAc) 전달 기술이 siRNA를 간에 배달하는 역할을 한다.
대사이상 지방간은 지방간에서 시작해 지방간염, 섬유화, 간경화, 간암으로 진행되는 만성질환을 말한다. 지금까지 음주와 관계없이 다양한 원인으로 간세포에 지방이 축적된다고 비알코올성 지방간염으로 불렸다. 전 세계에서 대사이상 지방간 질환을 가진 사람은 20~30%에 이르고, 그중 지방간염 질환은 전 세계 성인 인구의 5% 이상이 앓고 있다.
릴리와 인시트로는 대사이상 지방간을 치료하는 항체도 개발하고 있다. 인시트로는 항체 후보물질을 발견하고 남은 개발 단계를 맡는다. 항체 치료제의 권리는 모두 인시트로에게 돌아가고, 일라이 릴리는 마일스톤(개발 단계별 기술료)과 상업화 후 로열티(기술 사용료)만 받는다.
인시트로는 지방간 치료제로 쓰일 siRNA를 다른 신체기관의 지방에도 적용해볼 계획이다. 콜러 대표는 “지방간 질환을 치료하기 위해 개발한 방법은 다른 부위의 지방을 줄이는 데에도 사용할 수 있다”며 “발굴한 siRNA가 복부 지방에 작동하도록 만드는 방식이 대표적일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다만 이 연구는 독자적으로 진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인시트로는 일라이 릴리와 협력하기 전 이미 미국 길리어드 사이언스와 브리스톨-마이어스 스퀴브(BMS) 같은 글로벌 제약사와 협업했다. 길리어드와는 대사이상 지방간염을, BMS와는 신경계 질환 치료제를 개발하고 있다.
국내에도 신테카바이오(226330)나 파로스아이바이오(388870), 온코크로스처럼 AI 기술로 신약 후보물질을 발굴하는 기업들이 있다. 인시트로는 이들에 모범 사례가 될 수 있다. 콜러 대표는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은 AI 신약 기업이 글로벌 제약사와 협업하려면 차별성과 독창성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콜러 대표는 이날 연세대에서 열린 ‘제2회 태재미래교육포럼’에 참가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했다. 그는 미국 경제지 포브스가 선정한 AI 분야 주요 리더 중 한 명이다. 그는 “현재 AI는 미래를 내다보는 관점에서 매우 중요한 순간에 왔다”고 말했다.
콜러 대표는 “AI 신약 회사들은 대형 제약사가 내부적으로 갖고 있지 않거나, 다른 곳에서 얻을 수 없는 강점을 제공하려고 노력해야 한다”며 “(임상시험처럼) 약속한 것을 제대로 이행해 좋은 평판을 얻는 것도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AI에 대한 기대가 많은데, 수백 가지 새로운 약물을 만들겠다고 하는 것처럼 지나치게 화려한 약속은 좋지 않다”고 했다.
그는 또 “AI 생명공학기업들은 치료 가설을 세우고 특정 단백질에 개입해 치료제를 개발하는 데 집중한다”며 “이 기업 90% 이상이 임상시험에서 실패하는데, 치료 가설이 틀렸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콜러 대표는 “인시트로는 시간이 오래 걸릴 수 있지만 올바른 치료 가설을 선택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고 말했다.
콜러 대표는 올해 노벨 물리학상과 화학상이 AI 연구자들에게 돌아가면서 AI 기술에 전환점이 올 것으로 전망했다. 그는 의약품과 배터리, 생분해 플라스틱 기술처럼 과학 분야에서 AI를 응용한 사례는 더 많아질 것이라고 했다. 교육 분야도 예외는 아니라는 생각에 AI 교육 플랫폼 기업 코세라(Coursera)와 인게이지리(Engageli)를 창립하기도 했다.
콜러 대표는 “AI가 사람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해결해 변혁이 일어날 것”이라며 “이는 전기나 컴퓨터로 일어난 혁명과 비슷한 수준”이라고 말했다. 그는 “AI 기술 개발은 이미 막을 수 없는 상황이며, 만약 규제해야 한다면 응용 분야를 감시하는 것이 올바른 방법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