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헬스케어 기업들이 해외 시장에서 인수합병(M&A)으로 몸집을 키우고 있다. 해외 시장을 개척하고, 기업 가치를 더욱 높이기 위한 전략이다. 과거와 달리 국내 기업이 세계 M&A 시장에서 적극적인 매수자로 올라섰다는 평가도 나온다.
10일 업계에 따르면 제약·바이오·의료기기 사업을 하는 국내 기업들의 M&A 소식이 잇따르고 있다. 특히 그동안 국내 기업들이 몸집이 상대적으로 더 작은 국내 중소기업들을 사들였다면 이제는 세계로 눈을 돌려 해외 M&A 시장에 나온 기업 매물을 사들이는 데도 열을 올리고 있다.
의료기기 기업인 삼성메디슨은 지난달 30일 초음파 진단 리포팅, 인공지능(AI) 진단 보조 기능을 개발한 프랑스 스타트업 소니오(Sonio)의 지분 100% 인수를 완료했다. 소니오는 클라우드 기반의 다양한 의료 IT(정보기술) 소프트웨어와 AI 진단 보조 소프트웨어를 개발한 회사다. 소니오의 주요 제품은 실시간으로 초음파 영상을 평가하는 AI 소프트웨어인 디텍트이다. 미국 식품의약국(FDA) 승인을 통해 실효성을 입증받았다.
이번 인수는 AI를 결합한 의료기기로 제품군을 확대하고, 미국과 유럽 시장 점유율을 높이기 위한 전략으로 풀이된다. 유규태 삼성메디슨 대표는 "삼성의 앞선 기술력과 소니오의 AI 소프트웨어를 결합해 의료기기 접근성과 정확성 혁신을 선도해 갈 것"이라고 말했다.
진단 키트를 개발·제조하는 젠바디도 8월 미국 캘리포니아의 진단 키트 제조업체인 케이웰 랩(Kwell Laboratories)의 지분 100%를 인수했다. 이를 통해 미국 제조시설도 확보했다. 젠바디는 미국에서 직접 제조한 제품을 현지 시장에 공급할 계획이다. 정점규 젠바디 대표는 "미국의 '바이 아메리카(Buy America, 미국산 제품 구매)' 정책 기조에 부응하는 중요한 전략적 결정"이라며 "미국 현지 법인의 인수를 통해 글로벌 시장에서의 입지를 더욱 공고히 하게 됐다"고 했다.
의료 AI 기업 루닛(328130)도 지난 5월 21일 볼파라 헬스(Volpara Health) 지분 100%를 취득하고 자회사 편입을 최종 완료했다. 볼파라 헬스는 미국 내 2000곳 이상 의료기관을 고객으로 확보한 유방암 검진 특화 AI 기업이다. 코어라인소프트(384470)와 뷰노(338220) 등 다른 의료 AI기업들도 해외 기업과의 인수·합병 의지를 내비치고 있다.
헬스케어 분야 기업들이 해외에서 M&A를 하는 것은 기술과 제품 포트폴리오를 강화해, 현지 시장에 진출하는 데 도움을 받기 위해서이다. 이미 경쟁력 있는 기술과 제품을 보유한 기업을 인수하면, R&D 비용을 줄이고 시장 출시 시간을 단축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해외 기업 인수를 통해 현지 규제 장벽을 넘고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는 데 드는 비용과 지정학적 리스크도 줄일 수 있다. 국내 의료 AI기업의 한 관계자는 "한국 AI 기업들이 생존하려면 글로벌 시장 개척이 가장 중요하다" "현지 정부 기관과 시장에서 기술력을 인정받았거나 판매망을 확보하고 있는 기업을 찾고자 한다"고 말했다.
동화약품(000020)은 M&A로 현지 유통망을 확보했다. 회사는 지난해 베트남 약국 체인 기업 중선파마(TRUNG SON Pharma)의 지분 51%를 인수했다. 인수 대금은 약 391억원 규모였다. 중선파마는 1997년 설립해 베트남 남부 지역 내 140여 개 약국 체인을 운영하는 기업이다. 동화약품은 중선파마와 협업해 베트남 현지 매장 수를 현재 140여개에서 2026년까지 매장 수를 약 460개로 확장해 시장 점유율을 확대하겠다는 전략을 세웠다. 특히 활명수, 잇치, 판콜 같은 일반의약품과 건강기능식품, 화장품 등을 베트남 시장에 순차적으로 판매하며 시장을 확대할 계획이다.
이상규 삼일회계법인 이사에 따르면 2023년 국내 헬스케어 M&A 거래는 전년 대비 9% 증가했고, 거래 금액 규모는 75% 늘었다. 같은 해 글로벌 헬스케어 M&A 거래 건수는 전년 대비 8% 줄었고 거래 금액은 9% 늘어나는 데 그쳤다. 이상규 이사는 "올해부터 M&A 시장이 점진적으로 회복될 것으로 전망한다"며 "인플레이션과 고금리, 지정학적 긴장은 지속되나, 경제 주체들의 적응력이 높아지고 위험에 대한 민감도도 저하되면서 투자 심리가 회복되는 추세"라고 말했다.
국내 기업들은 해외 M&A를 추진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투자를 유치하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의료기기 리쥬란과 화장품을 제조·판매하는 파마리서치(214450)이다. 회사는 지난 5일 유럽계 글로벌 사모펀드 CVC로부터 2000억원 규모의 투자를 유치했다고 공시했다. 파마리서치는 이번에 확보한 투자금을 전략적 해외 M&A에 먼저 활용할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