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제약·바이오 기업들이 다음 달 미국과 스페인에서 열리는 글로벌 학회에 대거 참가한다. 최근 증권 시장에서 제약·바이오 업종의 주가 상승 기대감이 커진 가운데, 학회에서 발표되는 국산 항암제의 연구 결과가 기술 수출과 품목 허가 등의 성과로 이어질지 주목된다.
28일 업계에 따르면 9월 7~10일 미국 샌디에이고에서 열리는 세계폐암학회(WCLC)에 유한양행(000100), HLB(028300)(에이치엘비)가 참가한다. 에스티팜(237690), 루닛(328130)은 13~17일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열리는 유럽종양학회(ESMO)에 간다. 유럽종양학회는 3대 암학회 중 하나로, 미국임상종양학회(ASCO), 미국암학회(AACR)와 함께 영향력있는 세계 3대 암학회다.
전 세계 저명한 임상 전문가들과 기업들이 모이는 학술 행사에서 발표되는 연구 결과는 곧 미국과 유럽 규제 당국이 의약품을 승인할 때 핵심 근거가 된다. 이 때문에 학계뿐아니라 시장 투자자들의 관심도 크다.
◇유한양행 렉라자, AZ 타그리소와 경쟁될까
유한양행은 세계폐암학회에서 비소세포폐암 치료제인 렉라자(성분명 레이저티닙)의 단독요법 임상연구 결과를 발표한다. 렉라자는 앞서 2015년 유한양행이 초기 물질을 도입해 개발하다가, 2018년 미국 존슨앤드존슨(J&J) 자회사 얀센에 12억5500만달러(약 1조7000억원)에 기술 이전한 항암제다. 렉라자는 지난 20일 국산 항암제 최초로 미국 식품의약국(FDA) 허가를 받았다. 렉라자의 미국 미국 상품명은 라즈클루즈다. 이번 발표는 렉라자 기술을 사들인 J&J가 한다.
앞서 렉라자가 미국에서 허가를 받은 건 렉라자와 J&J의 이중항체 치료제 리브리반트(아미반타맙) 병용요법이다. 국소 진행성·전이성 비소세포폐암에 한해 1차 치료제로 두 약물을 같이 쓸 수 있다는 의미다. 이 허가의 주요 근거가 된 게 바로 지난해 유럽임상종양학회(ESMO)에서 발표된 두 치료제의 병용요법 임상 3상 시험 결과였다.
지난해 유럽임상종양학회가 렉라자의 미국 허가 문을 열게 한 자리였다면 이번 세계페암학회는 렉라자의 시장 확장성을 평가할 수 있는 무대다. 이번 학회에서는 렉라자의 단독요법 안전성과 유효성을 입증한 연구 데이터가 공개된다. 특히 경쟁 약물인 영국 아스트라제네카의 타그리소(오시머티닙)와 비교할 수 있는 데이터가 발표돼, 두 치료제의 경쟁 우위에 관한 세계 의약계 전문가들의 평가와 시각도 엿볼 수 있을 전망이다.
타그리소는 현재 가장 널리 쓰이는 비소세포폐암 3세대 표적치료제로, 주로 단독요법으로 쓰인다. 지난해 매출액만 약 8조원에 달한다. 먼저 공개된 학회 초록에 따르면 렉라자 단독요법이 타그리소와 유사한 효능과 안전성을 보였다. 주요 데이터를 보면 렉라자 단독요법의 무진행생존기간 중앙값(mPFS)은 18.5개월로, 경쟁약물인 기존 치료제 타그리소(16.6개월)를 앞선 것으로 나타났다. 무진행생존기간은 환자가 ‘질병의 진행 없이 생존한 기간’으로, 종양에 대한 약제의 직접적인 치료효과를 측정할 수 있는 지표다.
유한양행과 J&J에게 남은 중요한 과제가 타그리소가 장악하고 있는 시장에 침투해 시장 점유율과 매출을 올리는 것이다. 현재 성장인자 수용체(EGFR) 변이로 발생하는 비소세포폐암의 1차 치료 NCCN(미국국립종합암네트워크) 가이드라인에는 ‘선호(preferred)’로 타그리소 단독 요법만 등재돼 있다.
렉라자와 리브레반트 병용요법이 타그리소와 경쟁을 하려면 선호로 등재되는 게 중요하다. 등재 요건이 바로 우수한 효능과 안전성에 대한 근거다. 필요시 경제성도 평가에 반영된다. 이번 학회에서 항암제의 경쟁력을 평가할 수 있는 핵심 지표인 전체생존기간(OS) 추적 데이터도 추가로 발표될 예정이다.
◇HLB, 美 허가 불발 이후 재도전
HLB는 이번 세계폐암학회에서 미국 FDA 허가에 도전했다 고배를 마신 표적항암제 리보세라닙과 중국 항서제약의 캄렐리주맙 병용요법의 임상시험 결과를 발표한다. HLB는 앞서 간암 1차 치료제로 리보세라닙과 캄렐리주맙 병용요법을 미국 FDA에 신약허가를 신청했으나 지난 5월 FDA의 보완요구 서한을 받고 현재 재심사 신청을 준비 중이다.
앞서 미국 허가 기대감에 치솟던 HLB 주가가 곤두박질쳤는데, 이번에 발표되는 임상시험 결과와 학계의 평가가 투자 심리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주목된다. 현재 리보세라닙과 캄렐리주맙 병용요법은 간암뿐 아니라 폐암·위암·간암·식도암·대장암 등 여러 고형암 대상으로 수술전 보조요법으로의 확장을 노리고 있다.
HLB는 세계폐암학회에 이어 미국 자회사인 엘레바와 중국 파트너사 항서제약을 통해 유럽종양학회에서 총 9건의 리보세라닙 관련 연구 결과를 공개한다.
HLB에 따르면, 2021년 8월부터 지난해 9월까지 2년간 3기 비소세포폐암 환자 29명을 대상으로 수술 전 보조요법으로 리보세라닙과 캄렐리주맙 병용 치료한 임상 2상 결과, 종양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을 의미하는 완전 반응률(pCR)이 36.8%로 나타났다. 종양 크기의 감소를 비롯해 객관적인 반응을 확인한 환자 비율인 객관적 반응률(ORR)은 86.2%였고, 29명 중 20.7%의 환자에게서 종양 크기가 줄어들었다.
회사 측은 “이번 연구 결과는 수술 전 치료법으로서 리보세라닙 병용요법이 높은 잠재력을 가지고 있음을 입증한 것”이라며 “HLB의 리보세라닙 확장 행보에도 청신호가 켜진 것”이라고 말했다.
◇새 시장 도전 에스티팜·루닛 ESMO 출동
세계 최초의 경구용 대장암 치료제 개발에 나선 에스티팜은 유럽종양학회에서 STP1002(바스로파립)의 임상 1상 시험 결과를 공개한다. 바스로파립은 에스티팜과 한국화학연구원이 2014년부터 2년 동안 공동 개발한 신약 후보물질로, 텐키라제(TNK) 효소를 저해해 암세포 성장을 막는 원리다. 정맥주사인 기존 치료제와 달리 하루 1회 복용하는 경구용 제제로 개발 중이다. 바스로파립은 면역항암제와의 병용요법을 통해 대장암, 비소세포폐암, 유방암 등 고형암 치료제로 개발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의료용 인공지능(AI) 기업 루닛도 ESMO에 참가해 AI 기반 바이오마커(생체지표) 분석 플랫폼인 루닛 스코프의 연구 결과를 공개한다. 이는 미국 브리스톨-마이어스 스퀴브(BMS)의 면역항암제인 옵디보(니볼루맙)와 화학 항암제의 병용치료 반응을 예측하기 위해 진행한 연구다. 루닛은 병리 조직 이미지를 바탕으로 환자 종양의 특성을 분석하는 AI 모델을 개발해 상용화했는데, 더 나아가 면역항암치료에 대한 반응을 예측하는 바이오마커를 발굴하는 데 도전하고 있다.
루닛에 따르면 진행성 위암에서 면역항암제 병용요법은 최근 1차 치료제로 허가돼 사용 중이지만, 환자별 치료 반응이 달라 치료 효과를 예측할 바이오마커를 발굴해야 한다. 서범석 루닛 대표는 “이번 ESMO에서 한 단계 더 발전된 루닛 스코프 연구 성과를 공유해 AI 기술이 실제 임상 현장에 적용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