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출혈이나 뇌경색이 원인이 돼 발병하는 혈관성 치매는 전체 치매 환자의 30% 이상이 될 것으로 추산되지만 아직 치료제가 없다. 같은 치매의 일종인 알츠하이머병은 레켐비(성분명 레카네맙), 키썬라(도나네맙) 같은 신약이 있지만, 부작용으로 뇌부종이나 뇌출혈이 발생할 수 있어 혈관성 치매 환자들에게는 처방할 수 없다.
한국 기업이 세계 최초를 목표로 혈관성 치매 치료제를 개발하고 있다. 세브란스병원 생리학교실 정승수 교수가 세운 비엔에이치리서치가 그 주인공이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도 가능성에 주목해 STEAM연구사업의 미래유망융합기술파이오니어 전략형 과제로 선정했다.
세계 최초 치료제만 해도 대단한데, 정 교수는 훨씬 더 큰 그림을 그리고 있다. 나이가 들면 뇌 신경세포(뉴런)들의 연결부인 시냅스가 점점 자극에 반응하지 못한다. 이러면 ‘시냅스 가소성(synaptic plasticity)이 저하됐다’고 한다. 신경세포가 상황에 따라 변하는 능력이 떨어졌다는 말이다. 이에 따라 인지능력도 떨어진다. 정 교수는 시냅스 가소성을 복원하는 방식으로 혈관성 치매 같은 각종 뇌 질환을 고치는 것은 물론, 뇌의 인지기능을 어린 시절 수준으로 되살리고자 한다. 뇌의 회춘(回春)이다.
–혈관성 치매 치료제는 어떤 원리인가.
“인간의 뇌 기능과 인지능력은 뉴런의 수와 네트워킹에 의해 결정된다. 학습이나 사고(思考)를 통해 뇌를 자극하면 뉴런들이 서로 연결되면서 반응한다. 이것이 시냅스 가소성이다. 그런데 뉴런의 수는 태어난 이후 어느 정도 성장하고 나면 줄어들 뿐 늘어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뉴런의 연결·네트워킹을 활성화해 신경세포에 변동성을 주면 인지 기능이 더 활성화되지 않을까 생각해 볼 수 있다. 즉, 시냅스 가소성을 향상하자는 것이다.”
–뇌의 어느 부분을 공략하는가.
“뇌 대뇌피질의 시냅스 가소성은 기억과 학습·의사 결정과 같은 고등인지능력 조절에 깊이 관여한다. 그런데 대뇌피질의 시냅스 가소성은 발달 초기의 임계기간을 지나면 닫힌다. 나이가 들면 학습 효율, 난청·약시 치료 효과가 어릴 때보다 떨어지는 이유다. 또 트라우마나 뇌 손상·혈관성 치매 등이 발생하면 시냅스가 감소·저하해 인지기능에 장애가 생긴다. 비엔에이치리서치는 대뇌피질의 시냅스 가소성을 다시 활성화하는 신약을 만들고자 한다.”
–신약이 나이가 든 뇌를 어린 상태로 바꾸나.
“임계기간에는 대뇌피질의 시냅스 가소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신경계의 NMDA 수용체에서 GluN2B라는 단백질 발현이 증가하다가, 임계기간이 끝나면 GluN2A로 바뀐다. 이에 착안해 임계기간이 끝난 성인기·노년기의 대뇌피질에서 다시 GluN2B 발현을 증가시켜 시냅스 가소성을 재활성화하는 원리다.”
–뇌 재활치료를 하는 것과 같다는데.
“신약을 통해 뇌가 외부 자극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도록 만들어, 다른 치료제나 최근 화두가 된 디지털 치료제 같은 치료법의 효과를 극대화하는 것이 목표다. 우리는 일종의 ‘뇌 재활치료’로 이해하고 있다. 이를 통해 신경과·정신과 치료의 효율을 어릴 때 하는 것 같은 조건으로 만들어주고, 일상의 자극까지 치료 효과를 가지도록 만들고자 한다.”
–신약에 다른 치료법도 함께 쓰나.
“혈관성 치매의 경우에는 신약 BNH101B와 함께 초음파를 한 곳으로 모으는 집속 초음파 치료를 병행하려고 한다. 혈관성 치매에 최적화한 신약으로 뇌의 시냅스 가소성을 높인 상태에서, 별도로 개발 중인 집속 초음파 기기를 이용해 뇌신경을 자극하는 방식으로 뇌의 인지 기능을 향상할 수 있다는 가설을 세웠다.”
–다른 질병에도 적용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다. 혈관성 치매도 결국은 여러 원인에 의해 뇌의 시냅스 가소성이 떨어져 발생하는 질환이다. 혈관성 치매와 알츠하이머병같은 신경 퇴행 장애뿐 아니라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자폐증 등 뇌 질환 전반에 적용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를테면 현재 개발 중인 알츠하이머병 치료제들은 뇌에 있는 아밀로이드 베타나 타우라는 단백질을 제거하고자 하는데, 단백질을 제거하는 방식만으로는 치매의 진행을 지연시킬 뿐 인지 기능을 회복하진 못한다. 그래서 경도성 인지기능 장애나 초기 알츠하이머병에 주로 쓰인다. 인지기능까지 회복하려면 결국 시냅스 가소성이 복원돼야 한다.”
–지금 알츠하이머병 신약과 달리 중증도 치료할 수 있나.
“우리가 개발하는 신약으로 시냅스 가소성을 되살리면 병행하는 다른 치료법으로 알츠하이머병의 경과 자체를 바꿀 수 있다. 그래서 중증 알츠하이머병도 치료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실제로 다 자란 생쥐를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는 인지 기능이 개선된 결과가 나왔다. PTSD는 스트레스나 충격에 의해 대뇌피질에 박힌 기억의 조각이 공포를 일으키는 인자와 연결되는 것이 문제다. 이 고리를 끊고 나서 시냅스 가소성을 다시 활성화하는 PTSD 치료제로도 개발하고 있다.”
–약물과 뇌 자극을 병행하는 것은 처음인가.
“외국에서도 ‘스마트 드럭’과 같은 이름으로 이미 비슷한 개념의 신약과 치료법 개발이 이뤄지고 있다. 최근 미국에서는 인지 능력이 떨어진 제대 군인들을 대상으로 약물과 직접 전류 자극 방식을 병행해 뇌를 자극했더니 치료 효과가 비약적으로 상승했다는 보고가 나왔다. 두개골 때문에 전류로 뇌에 자극을 주는 것이 쉽지 않은데, 약물과 결합하자 자극을 통한 치료 효과가 극대화한 것이다. 이처럼 자극과 약물을 결합하는 논문이 이제 나오기 시작했다. 그중 한국에서 대뇌피질의 시냅스 가소성과 디지털 치료제를 결합하는 연구개발에 대해 펀딩을 시작한 것은 비엔에이치리서치가 최초인 것으로 안다.”
–뇌를 다시 젊게 할 수도 있다는데.
“궁극적으로는 치매 환자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노화를 극복한다는 의미가 있다. 노화에 의한 인지기능 저하나 뇌의 효율성 저하를 되돌린다는 것이다. 다만 개발 중인 치료법이 만병통치약은 아니라는 점을 짚고 넘어가야 한다. 시냅스 가소성이 제대로 활성화하려면 환자에게 치료·재활 의지나 동기가 있어야 한다. 시냅스 가소성의 효율이 동기나 의지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치료 의지가 없는 환자에게 사용할 경우 오히려 뇌에 자극이 줄어드는 역효과가 나 인지능력이 떨어질 수 있다.”
–환자의 의지, 동기 외 필요한 조건은.
“환자가 스트레스를 받으면 안 되는 환경이 필요하다. 시냅스 가소성이 활성화하더라도 억제성·흥분성 뉴런이 균형을 맞춰야 부작용 없는 치료가 가능하다. 치료에 대한 스트레스나 열악한 환경으로 균형이 무너지면 흥분성 뉴런이 억제성 뉴런을 압도하면서 학습·인지기능에 경련이 나타날 수 있고 치료 효율도 떨어진다. 이 같은 이유로 환자의 의지와 환경을 통제할 수 있는 분명한 치료 프로토콜(규칙 체계)이 필요하다. 프로토콜 없이 오·남용된다면 인지능력이 더 떨어지는 것은 물론이고 자폐증·뇌전증 같은 발달장애가 나타나거나, 인격에도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있다.”
–향후 구체적인 개발 계획은.
“지난 6월 식품의약품안전처로부터 알츠하이머병 치료 약물 BNH101에 대한 임상 1상 시험 계획(IND)이 승인받아 오는 9월부터 1상을 시작한다. 내년 3월쯤 임상 1상이 끝나 전임상 자료가 만들어질 때쯤 집속 초음파 기기 시제품 제작도 마무리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면 BNH101B를 초음파 집속기와 결합하는 임상 2상을 진행할 수 있게 된다. BNH101과 혈관성 치매 치료 약물 BNH101B는 완전히 같은 물질이고 표적으로 하는 질환만 다르다. 아마 2026년 초쯤일 텐데, 그때 가서 치료 효과에 대한 증거가 확보되면 2상을 진행할지 기술 이전을 할지 결정하려고 한다.”
–연구 개발에서 아쉬움이 있다면.
“BNH101의 초기 연구가 마무리되면 대규모 자본을 동원할 수 있는 글로벌 대형 제약사들이 이 기술의 과실을 많이 가져가리라 예상한다. 연구의 파급력을 생각하면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신약과 새 치료법을 적용할 수 있는 표적 질환이 굉장히 많은데, 각 질환이 아닌 총체적·조직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펀딩이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