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소니 시카렐로 AC스탠다드 컨설팅 컨설턴트가 27일 서울 중구 더 플라자호텔에서 열린 '2024 범부처 의료기기 제품화 지원 거버넌스 통합 포럼'에서 비대면으로 발표하고 있다./김명지 기자

“1990년대 중반 도입된 스크린쿼터제가 지금의 한국 영화산업의 부흥을 이끌었습니다. 한국 의료기기도 제도적 지원만 뒷받침되면 영화산업처럼 기적을 이룰 수 있을 겁니다”

윤석준 고려대 보건대학원장은 27일 서울 중구 더 플라자호텔에서 열린 ‘2024 범부처 의료기기 제품화 지원 거버넌스 통합 포럼’에서 “국산 의료기기가 세계에서 인정받으려면 신뢰성을 확보해야 한다”며 이 같이 말했다.

◇한국 의료기기 신뢰성 확보 방안 고민

국내 의료기기 기술 수준이 세계적 수준에 이르렀지만, 정작 국내 대학병원들은 국산 의료기기를 쓰기를 꺼린다. ‘품질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윤 원장은 “국산 의료기기에 대한 신뢰 부족 문제는 제도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며 “상급종합병원에서 국산 제품을 쓸 수 있는 ‘스크린쿼터’ 제도와 같은 환경을 조성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스크린쿼터란 영화라는 뜻을 가진 ‘스크린(screen)’과 할당량이라는 뜻을 가진 ‘쿼터(quota)’가 합쳐진 말이다. 극장에서 일정 기간 의무적으로 자국 영화를 상영하도록 하는 제도다. 윤 원장은 지난 2006년 정부의 스크린쿼터제 축소 추진 당시 안성기, 최민식 등 국민배우들이 서울 충무로에서 기자회견을 한 장면을 언급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10년이 지나 기생충과 같은 국산 영화가 국제 영화제에서 최고상을 수상하자, 이제 문화계에서 스크린쿼터제 폐지 목소리가 나온다.

국민배우 안성기는 지난 2006년 1월 서울 중구 남산동 한국영화감독협회 시사실에서 스크린쿼터 축소를 막기 위한 '영화인 긴급 기자회견'을 열었다. /조선DB

윤 원장은 스크린쿼터처럼 보건복지부가 지정하는 상급종합병원 평가 기준에 ‘국산 의료기기 비율’을 넣는 방안을 제시했다. 국내 상급종합병원의 국산의료기기 점유율은 지난 2020년 10%에서 지난해 12%로 소폭 올랐다. 윤 원장은 “한국 대학병원의 국산 의료기기 비율이 30%로만 높아지면 국산 의료기기의 글로벌 시장 진출도 충분히 가능하다”고 말했다.

윤 원장은 또 “국내 병원의 국산 의료기기 점유율이 12%라고 하지만, 국산 의료기기를 쓰지 않는 대학병원들도 여전히 많다”며 “상급종합병원 평가 기준에서 국산 의료기기 구매 비율을 ‘10% 이상’으로만 지정해도 큰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제안했다. 그러면서 “병원이 국산 의료기기 산업 분야에 친화적으로 작동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처럼 자국 제품을 보호하는 제도는 한미자유무역협정(FTA)등에 저촉될 수 있다. 이에 대해 윤 원장은 “외교적으로 정부가 풀어나갈 문제”라고 설명했다.

◇고장 예측하고 부품 교체 서비스 필요

국산 의료기기 제품이 다국적 기업 제품만큼 신뢰도를 쌓으려면 ‘유지 보수’의 관점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왔다. 고가의 고난이도 의료기기 장비는 일회성 소재 부품과 달리 장기간 두고 사용하기 때문에 내구성과 관리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날 비대면으로 참석한 앤소니 시카렐로 AC 스탠다드 컨설팅 컨설턴트는 “의료기기 국제 표준에서 구체적으로 신뢰성을 요구하지는 않지만, 제조업체는 위험 관리의 측면에서 기기의 수명을 예측할 수 있도록 문서를 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신뢰성이라는 것은 위험 관리 프로세스의 일부이며, 이는 제조업체의 책임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날 발표자로 참석한 박정원 전 한국산업기술시험원 부원장도 “고가의 장비는 ‘시험’보다는 사용 과정에 대한 평가가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정부의 정책 패러다임도 빠르게 바뀌고 있다. 정부가 부품소재 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지난 2001년 부품소재기업법이 제정됐고, 이후 2011년에는 신뢰성 향상을 위한 소재부품기업법이 만들어졌다. 그런데 지난 2019년 일본 수출규제로 인해 소재부품장비 정책으로 발전했다. 이제 산업 정책의 관심이 소재 부품에서 ‘장비’로 확대된 것이다.

박 전 부원장은 장비의 신뢰성 확보에 쓰이는 ‘신인성(信認性)’ 개념을 소개했다. 신인성이란 제품의 성능을 측정할 때 쓰는 개념으로 단순 신뢰성을 넘어 유지보수성, 보안성 등을 포함한다. 박 전 부원장은 “중장비의 경우 제품이 고장이 났을 때 제조사가 얼마나 빠르게 대응하는지가 중요하다”며 “의료기기 장비도 마찬가지가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요즘 장비 업체들은 제품의 고장을 미리 예측해 부품을 교체하는 서비스로 경쟁력을 확보한다”고 설명했다.

윤 원장은 또 지난 2022년 범부처 전주기 의료기기 연구개발사업단과 의학한림원이 추진한 국산의료기기 민간인증제도 소개했다. 윤 원장은 “국산 제품의 브랜드 가치 향상을 기대했으나, 오히려 업계 대표들이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고 전했다. 인증제가 또 다른 규제가 될 것을 우려한 때문이다. 윤 원장은 “이 같은 선입견과 오해를 해소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며 “인증제가 부담스럽다면 추천제를 도입하는 것도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